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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 서사를 파괴하고 여성의 삶을 그리다

[넷플릭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 '디나'의 삶을 그린 <레드 텐트> 리뷰

하민지 2017년 06월 11일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성경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청소년 시절 성서 만화에서 본 내용 말고는 성경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상식이나 교양 수준의 내용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레드 텐트>는 성경의 제일 첫 장인 창세기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다. 정확히는 창세기 29장부터 50장까지의 이야기다. 성경 내용을 드라마화 했다길래, 처음에는 "재미있으면 뭐 얼마나 재미있겠어"라는 생각이었다. 누워서 노트북을 배에 올려 놓고 드라마를 켰다.

그런데, 드라마가 시작된 지 10초만에 벌떡 일어나 각 잡고 시청하기 시작했다. 아래의 내래이션 때문이었다.

image <레드 텐트> 포스터. 주인공 '디나'의 모습.

"수천 년간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내 기억은 먼지에 불과했다. 오로지 내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름만 기록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당신들의 성서에 나와있지만, 내 이야기는 그저 각주에 불과했다. 슬프고 폭력적이지만 거의 잊힌 이야기.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지만 어머니와 딸의 인연은 끊어졌고 남자들의 이야기만 전해졌다.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원에만 관심있는 남자들은 한 소녀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야곱의 외동딸이었던 바로 나, 디나."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야곱의 많은 자식 중 유일한 딸, '디나'의 이야기다.

남성 중심 서사에선 기록되지 않았던 인물, '디나'

드라마는 디나의 일대기를 다룬다. 성경에도 디나의 이야기가 있을까.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창세기를 읽었다. 창세기 1장부터 50장 중, 디나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은 34장 뿐이다(뒤에도 한 번 더 나오긴 하는데,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족보처럼 설명된 부분에 레아가 디나를 낳았다고 한 문장 나올 뿐이다.).

image 사진=홀리넷 갈무리

창세기 34장 2절을 보면,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디나를 강간한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 그리고 디나의 아버지인 야곱과 디나의 형제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의논한다.

그런데 이 남자들, 디나의 의사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남자들은 하몰 집안과 야곱 집안의 명예를 두고 서로 자존심 싸움만 할 뿐이다. 심지어 신조차 디나의 고통에 대해 별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음은 창세기 34장, 그러니까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장의 마지막 절이다. 디나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하는 말이다.

창세기 34장 31절 |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 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

디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바로 다음 구절은 창세기 35장 1절이다.

창세기 35장 1절 |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베델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 네가 너의 형 에서 앞에서 피해 도망칠 때에, 너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쳐라."

신은 야곱이 에서를 어떻게 피하면 되는지만 가르친다(야곱은 에서는 형제다. 동생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고, 그로 인해 에서를 두려워하는 중이었다.). 디나의 이야기는 34장을 끝으로 온데 간데 없다.

이 드라마는 오로지 상상력만으로 만들어졌다. 남성 중심 서사의 원 텍스트에서 한 번 언급되고 말아버린, 별 비중있는 인물도 아니었고 신이 특별히 사랑한 사람도 아닌, 단역에 가까운 인물이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주인공이 됐다.

드라마에서 디나는 세겜에게 강간 당하지 않았다. 세겜과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세겜은 야곱에게 결혼을 허락받으러 가자고 디나에게 말했다. 디나는 대답한다.

"내 인생이에요. 내가 누구랑 결혼할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결정해요. 내 삶, 내 미래, 내 선택."

<레드 텐트>, 여성을 길러 내는 통시대적 공간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난 다른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붉은 천막(기자 주 : 레드 텐트)과 나를 길러준 여자들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나는 야곱의 네 아내의 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성스러운 곳. 여성들이 월경을 치르러 들어갔던 곳에서 내 어머니들의 비밀과 지혜, 사랑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 시작하자마자 나온 내래이션 중 일부다. 이 내래이션을 듣고, 누워 있던 자세를 고친 것도 모자라 안경도 썼다.

image 레드 텐트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모 라헬과 디나.

그동안 내가 보고 들었던 일부다처제의 여성 텍스트는 질투와 가해, 복수의 이야기로 점철돼 있었다. 남편 한 명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혹은 아들을 낳아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여성들은 잔혹한 처벌과 복수극을 벌였다.

그러나 <레드 텐트>의 여성들은 남자 한 명을 위해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금남의 공간인 '레드 텐트'안에서, 서로를 보듬는 자매애를 다진다. 또한, 이 여성들은 남성들이 믿는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지 않는다. 생명의 원천 '이난나'를 신으로 섬긴다.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작은 동상을 대대손손 물려 주며, 여성만이 생명을 잉태하고 이 땅을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다.

누군가는 "이 여성들이 남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에 너무 세뇌돼 버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당시(창세기의 시대적 배경은 기원전 10세기라고 주장돼고 있다.)에 남성을 중심으로 부족과 나라가 번성했던 걸 생각해 보자. 드라마에서 야곱은 아내 라헬(디나의 엄마이자 레아의 여동생이다. 즉, 디나의 이모다. 레아ㆍ라헬 자매가 야곱 한 남자와 결혼했다.)에게 말한다. "내가 당신의 왕이야!" 이처럼 남성은 가문의 통치자이자 최고 결정권자였고, 여성은 남성의 생애 목표인 가문 번성에 동원되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졌다.

레드 텐트 안의 여성들은 자신들을 가문 번성의 주체라 생각한다. 비록 남성들이 알면 우상 숭배한다고 화를 낼 게 뻔하기 때문에, 은밀히 이난나를 섬긴다. 그러나 남성들이 믿는 신을 섬기지 않고 자신들의 신, 그것도 '생명의 원천'이라는 신을 섬기며 여성들로 인해 부족과 국가가 번영된다고 생각한다.

image 디나와 그의 엄마 레아.

디나는 이곳에서 생명을 귀히 여기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누구한테 허락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사랑하길 꿈 꾸는 여성으로 길러진다.

물론 이런 디나의 삶에도 우여곡절이 있다. 이 우여곡절의 원흉은 아버지 '야곱'이다. 야곱이 나이가 들어 죽게 되자, 디나는 아버지 옆에서 임종을 지킨다(이 또한 성경과 다른 내용이다. 성경에선 야곱이 예뻐했던 아들 요셉이 야곱의 임종을 지켰다.). 야곱의 죽음 앞에서 지난 세월을 용서한 디나는, 바로 레드 텐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레드 텐트를 지키고 있던 자매들과 대화를 나눈다.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삶의 멍에를 벗어던지자 마자, 자신이 태어나고 길러졌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레드 텐트는 여성의 포궁을 상징하는 걸까. 디나는 아버지로 시작된 고통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 걸음을 내딛으며 레드 텐트로 들어갔다. 레드 텐트의 자매들과 함께, 디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삶, 충분히 그려낼 수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소위 '알탕영화(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를 보며 적잖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부산행>에서 여성들이 하다 못해 야구공이라도 집어 던져 좀비들을 물리칠 수는 없었을까. <베테랑>에서 '미스 봉'은 남성 형사들을 보조하는 역할에만 머물러야 했을까. <신세계>, <범죄와의 전쟁> 등 당장 떠오르는 한국영화의 인기작들은 모두 남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같은 한국영화의 아저씨 서사에서 여성의 역할을 좀 확대시킬 수 없냐고 질문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체로 이렇다.

"현실이 그렇잖아요.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현실이 그렇긴 하다. 신고 전화 포스터를 만들더라도 남경은 사건 해결, 여경은 민원 상담을 담당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실제 여경이 민원 상담 뿐만 아니라 사건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설지라도, 대외적으로 여경은 남경을 보조하는 걸로 비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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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와 같이 대답하는 사람들은 <레드 텐트>의 풍부한 상상력을 배워야 한다. 기원전 10세기, 여성이 스스로를 가문과 나라 번영의 주체자라고 여겼는지,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내 인생 내가 결정해요"라고 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허나 <레드 텐트>는 상상을 통해 충분히 주체적인 여성을 그려냈다. 상상력을 동원했다고 해서 아예 허구적이라는 게 아니다. 오늘날, 스스로를 삶의 주인이라 여기는 여성들을 남성 중심 서사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현 시대의 섬세한 관찰력과, 시대를 관통하는 감각,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