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차 한 모금이 만드는 당신 삶의 변화

밀레니얼의 '덕업일치' (5) 티 블렌더

윤지원 2017년 06월 15일

밀레니얼 세대의 직업이라고 하면 언론에서는 흔히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의 직원, 공무원, 알바, 혹은 IT 스타트업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직업은 직장과 다르다. 디퍼는 그들이 생각하는 ‘업’이 궁금해졌고, 일상적으로 분류되는 ‘직장'에 만족하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가 택하는 직업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했다. 돈을 벌기 위한 일자리(job) 보다는, 자신을 표현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직업(profession)은 어떤 것이고, 어떤 사람들이 하고 있을까?


이은빈
여자, 30세
알디프 대표
서울 이태원 우사단로

단정한 흰색 벽에 남색 지붕, 가운데가 뚫려 있는 모양의 알이 삼각형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용산구 이태원 안에서도 가장 이국적인 우사단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성인 세 명이 옹기종기 앉을 크기의 아담한 가게가 있다.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차 냄새가 향긋하다. 티 바(tea-bar)에 서 있는 그녀가 건네는 대로 칵테일 잔을 입가에 갖다대자 부슬부슬 뿌려둔 설탕 아래 상큼한 레몬 시럽의 달큰함이 혀에 느껴진다.

그렇게 두시간 여 차(茶) 산책을 즐기고 나면, 번잡한 도시 속 나만의 고요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다. 당신을 향기로운 동화 속으로 이끄는 그녀는, Tea & Life Style 브랜드 ‘알디프’의 티 블렌더이자 대표 이은빈 씨다.

티 블렌더(Tea Blender)
티를 블렌딩하는 사람.
두 가지 이상의 티를 섞거나, 티와 여러 식재료를 혼합해
창의적으로 새로운 맛과 향을 가진 블렌딩 티를 만들어 내는 티 전문가.

image 사진=박상현

삶이 오롯이 담겨진, 알디프의 티백

알디프의 차는 ‘나’를 지향한다. 작고 섬세하지만 공들인 티가 나는 디테일한 디자인에서부터 차례로 색과 맛이 바뀌는 풍부한 향, 각 티백마다 정해져 있는 테마곡, 차 한 잔에 오감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납작한 삼각기둥 모양의 티백은 이 씨가 알디프를 창업하게 된 궤적이 그대로 담긴 작품이다.

“알디프(ALTDIF)의 A는 아트(art), L은 라이프(life), T는 차(tea)의 앞 글자에서 따 왔고요, DIF는 존엄성(dignity), 차이・다양성(difference) 등을 의미해요. 저희 심볼도 보면 열려 있는 알이잖아요?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에서 따 왔죠. 알디프는 작은 변화로 인해 세계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믿어요. 그 변화는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이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죠.”

image 사진=박상현

알디프를 시작하기 전, 이 씨는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일 년 간 ‘집순이’ 생활에 전념했다. 휴학도 없이 24살에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대기업 뷰티 브랜드의 BM(Brand Management)은 예쁜 것, 향기로운 것을 좋아하는 이 씨의 적성에도 잘 맞았다.

하지만 제품을 기획하고 만드는 작업에 불만이 들기 시작했다. 트렌드, 유행, 매 시즌마다 휙휙 바뀌고 휘둘리는 욕망들, 소비자에게 새 것을 구매하라고 종용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담을 수 없다는 고민이었다. 때마침 접한 친구의 이유 모를 자살과 승진해 건너간 해외 법인에서 당한 성희롱적 발언과 업무 압박은 이 씨의 고민에 방아쇠를 당겼다. 이렇게 남들보다 한 발짝 빨랐던 취업은 남들보다 열 발짝 빠른 퇴사로 이어졌다.

떠난 길에 다시 서다, 이번엔 ‘내 브랜드’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도태된다'는 생각으로 쉼 없이 살아오던 생활에 휴식이 주어지자 시간이 너무 많았다. 일주일만에 그 길다는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정주행을 끝냈다. 속도와 유행을 피해 찾은 시간인 만큼, 바빠서 잊고 있던 나를 돌보고 탐구하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워낙 책과 예술을 좋아해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될까 생각도 했다. 뭔가 사회에 가치가 있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고 그런 자신의 신념을 담은 글을 혼자 계속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내 길은 창작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게 제품의 형태를 띨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마케팅의 길을 벗어났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늘 인생의 힌트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법.

image 영상=정경록

“차 마시기가 취미예요. 먹는 것도 좋아하고요. 내내 집에 있다보니까 밥 먹고 차 마시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이걸 SNS에 비공개 계정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내용이 쌓이다 보니 남들에게도 제가 아는 걸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근데 우리나라에서 어디 회사에서 일하다가 티 팟에 차를 우려 마시는 사람이 있나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차를 쉽게, 많이 마시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당시 만나고 있던 애인이 이 씨에게 창업을 권했다.

“그 친구는 스타트업에 종사하던 친구였어요. 저는 그런 건 IT쪽 사람들만 하는 건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 친구가 "네가 하고 싶은 창작의 욕구가 브랜드를 통해서도 표출될 수 있다, 네가 말하는 그런 사회적 가치들을 기업을 통해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소개해줬어요."

그 해 겨울, 차 자격증을 땄다. 이듬해인 2016년 4월, 청년창업사관학교를 통해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11월 정식으로 ‘2016 서울카페쇼'에서 데뷔했다.

티는 과학과 예술의 조화, 사업은 종합예술

“사람에게 먹는 것은 아주 중요해요. 사람의 먹거리는 옛날과 달리 지금은 굉장히 다양하게 선택될 수 있잖아요? 저에게 차는 자신의 취향을 찾는 도구예요. 차만큼 정말 베리에이션이 다양하고 자기 취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음료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은빈 씨는 우리나라에서 차가 엄숙한 격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커피나 칵테일의 다양한 변용을 젊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기억하고, 특정 메뉴가 자신을 드러내는 음료라고 생각하듯 차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image 사진=박상현

“티 블렌더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이 있는데, ‘티 블렌딩은 과학과 예술의 조화다'라는 말이에요. 차는 기본적으로 화학으로 이루어져있어요. 예를 들어, 알디프의 ‘나랑 갈래'라는 차는 루이보스 티 베이스에 산딸기 크림향을 살짝 넣은 맛이에요. 근데 ‘나랑 갈래'를 밀크티로 즐길 경우, 베리류가 산성이기 때문에 우유와 만나게 되면 높은 온도에서 뭉쳐요. 그래서 ‘나랑 갈래'는 70도 이하의 우유와 즐겨야 해요. 결국 음료를 만드는 것은 과학과 예술의 어떤 경계에 있는 거고, 그래서 저에게 사업은 하나의 종합예술이에요."

오감을 자극하는 티

알디프의 가장 독특한 점은 각 맛마다 메인곡이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스페이스 오디티'는 데이빗 보위의 ‘Space Oddity’와 ‘우주에서는 라즈베리나 파인애플같은 과일향이 나지 않을까'라는 내용의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차는 그냥 물에 우려냈을 때에는 예쁜 보라색을 띤다. 여기에 레몬즙을 떨어뜨리면, 마치 풍성한 분홍색 구름이 우주에 피어나듯 섬세한 분홍 빛으로 변한다. ‘스페이스 오디티'를 마실 때마다 보위의 음악을 들으면, 노래에 얽힌 기억이 떠오르며 당시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이 씨는 차를 즐기는 한 사람 사람마다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유도했다.

티를 한 가지 방법으로 즐기지 않고 베리에이션(원형에 다양한 요소를 더해 변화를 준 버전)을 가미한 점도 눈에 띤다. 마치 칵테일을 즐기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 가게를 바 형태로 꾸민 것도 한 몫 했다.

image 사진=박상현

“커피를 코스로 내는 건 본 적이 있거든요. 근데 차는 아직까지 그런 데가 없어요. 지금 코스는 봄 에디션으로, 벛꽃 숲으로 가는 여정이에요. 세 분의 손님을 앞에 두고 제가 메뉴를 하나씩 내가면서 설명을 해드리는 거예요. ‘보랏빛 어둠이 녹는 강을 지나면 벚꽃나무가 있는 숲에 도착하고, 밤이 되면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달이 뜬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집에 간다' 이런 이야기를 담은 다섯 가지의 티를 담았죠."

퍼져나가는 찻잔 속 향기처럼, 사회에 변화를 이끌기

티 바는 인기 많은 모델이지만, 알디프의 주요 수입원은 아니다. 결국 계속 제품을 만들어내고 수익 구조를 발전해야하는 숙제가 있다. 이은빈 씨는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공부하려 한다. 이 씨와 알디프는 분명 트렌디하지만, 유행의 선두주자라든가 꼭 사지 않으면 뒤쳐지는 제품은 아니다. 화려한 튜닝 제품들 중 오히려 순정품이 빛나듯이, 이 씨가 추구하는 트렌디함은 ‘요즘 힙한 사람들이 뭘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이다.

“알디프의 강점이 예쁜 디자인인 것은 맞아요. 새 에디션이 런칭될 때마다 6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치죠. 하지만 예쁜 것에서 끝나면 안 돼요. 진짜 가치를 담아야 해요. 알디프는 획일적인 취향을 강요하는, 혹은 강요되는지도 모르고 받아들여지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image 사진=박상현

그 방법은 늘 먹고 마시던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메뉴를 골라 보고 도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다. 차 취향을 고르는 일은 사소하다. 하지만 그 선택의 시간이 스스로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평소의 내 취향을 돌아보게 되고, 그 탐구가 결국은 조금씩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씨는 차를 통해 다양한 자신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제공한다.

“저는 페미니스트예요. 그래서 제 삶이, 그리고 제 브랜드가 인간을 존중하는 가치를 담았으면 해요. 자기 취향을 찾는 여유가 주어지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하고, 존엄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알디프는 그런 사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