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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 출생의 비밀

일부다처, 서프러제트, 핀업걸, 그리고 거짓말 탐지기

박상현 2017년 06월 21일

서프러제트

1911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초청 강연회를 두고 학생들과 학교 사이에 큰 갈등이 생겼다. 초청된 연사는 에밀린 팬커스트라는 여성이었고, (믿어지지 않겠지만) 하버드 대학교는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이 강단에 올라서 연설을 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팬커스트를 연사로 세우자는 학생들의 요구가 무리는 아니었다. 하버드가 과거에도 예외적으로 여성 연사를 허용한 예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학교가 팬커스트의 강연을 불허하기로 한 진짜 이유는 그가 영국에서 요란한 여성참정권운동을 벌이면서 유명해진 인물, 즉 서프러제트(suffragette)였기 때문이었다. 팬커스트와 그의 지지자들은 영국의 총리공관이 있는 다우닝가에서 자신의 몸을 쇠사슬에 묶고 시위를 벌인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던 참정권 운동에서 사용한 쇠사슬 시위는 그 기원이 19세기 노예해방운동에 있었고, 남성중심사회에서 속박당한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image 사진=쇠사슬로 몸을 묶고 시위 중인 영국의 서프러제트 (Women's Library)

팬커스트를 둘러싼 하버드 대학교의 논란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것을 직접 목격한 학생 중 하나가 윌리엄 몰튼 마스턴이다. 훗날 심리학자가 된 마스턴은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헐리우드에서 콘텐츠 제작과 관련된 컨설팅 일을 했다. 팬커스트 논란이 있은 지 30년 후, 그는 DC 코믹스가 수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남성 수퍼 히어로에만 집착하지 말고 여성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 원더우먼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흥미롭게도, 마스턴이 만들어낸 원더우먼은 1) 남성에 의해 2) 쇠사슬에 묶이면 초능력을 모두 상실한다.

원작자 마스턴의 비밀

마스턴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원더우먼이 가진 중요한 무기 중 하나인 '진실의 올가미(Lasso of Truth)’는 몸에 감기면 반드시 사실을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심리학자였던 마스턴은 오늘날 전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거짓말 탐지기(polygraph)를 발명한 사람이다.

image 사진=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한 윌리엄 마스턴 (Smithsonian Magazine)

하지만 그에게는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두 명의 아내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지금도 일부다처제를 법으로 금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1920년대는 (과거 일부다처제로 유명했던) 몰몬교에 대한 탄압도 심했던 시절이다. 그런 그가 아무도 모르게 두 명의 여성과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지만, 자세한 내용은 더욱 기묘하다.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다가 결혼한 아내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당시에는 드물게 대학을 다녔을 뿐 아니라, 전문직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런 아내를 둔 마스턴은 자신이 강의하던 대학에서 만난 올리브 번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가서 사실을 털어놓고 세 명이 같이 살자고 말하면서, “만약 그게 싫으면 나는 당신과 이혼하고 올리브와 살겠다”고 선언한다. 아내 엘리자베스는 충격을 받았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고 함께 사는 것에 동의한다.

마스턴의 아내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남편의 첩(?)으로 들어온 (자신보다 10년 어린) 올리브가 엘리자베스의 아이들까지 함께 키워주기로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아이를 기르면서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던 엘리자베스로서는 그런 이상한 결혼생활이라도 하는 것이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보다 나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자연애, 혹은 일부다처

그렇다면 멀쩡한 가정에 들어와서 다자연애(polyamory) 관계를 하기로 한 올리브 번은 어떤 사람일까?

올리브는 미국에서 안전한 피임(birth control) 방법을 전파한 인물이자, 안전한 가족계획 방법을 제공하는 단체 플랜드 패런트후드(Planned Parenthood)를 설립한 전설적인 여권 운동가 마거릿 생어의 조카다. 올리브의 어머니는 언니 마거릿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면서 (삽입형 피임기구를 홍보하는 것은 음란죄에 저촉되던 시절이다) 까지 당시로써는 급진적인 여권운동을 하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의 딸이 일부다처의 형태로 남의 가정에 들어가서 이웃에게는 식모라고 속이고 살았다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1].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여성은 마스턴이 1947년에 세상을 떠난 후 거의 40년 동안을 함께 살며 친구처럼 지내며 아이들을 키우고, 손주들까지 함께 돌봤다. 일부에서는 마스턴의 원더우먼이 이 두 사람을 모델로 했다는 주장을 한다. 특히 마스턴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젊은 시절 사포(레즈비언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의 섬 레스보스 출신의 시인)의 글을 즐겨 읽었다는 사실은 여성들만이 사는 아마존 출신인 원더우먼 스토리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을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와 올리브 사이의 우정을 설명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원더우먼

마스턴이 원더우먼의 스토리를 만들어냈을 때 만화가인 H. G. 피터에게 요구한 원더우먼의 모습은 당시 유행하던 핀업걸의 이미지, 정확하게는 바르가 걸(Varga Girl)의 이미지였다. 몸에 착 달라붙는 수영복을 입고 긴 다리를 드러내고, 하이힐을 신은, 남성을 위한 여성의 성적 이미지의 전형이다. 그런 여성의 이미지를 가져와 창조해낸 원더우먼이 때로는 채찍을 휘두르고, 때로는 쇠사슬에 묶여 꼼짝 못하는 모습으로 만화에 등장하자, 남성들의 소위 SM 취향을 자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image 사진=마스턴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여권운동에 사용된 원더우먼의 이미지 (Psychology's Feminist Voices)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집권했던 미국의 보수적인 1950년대의 분위기에서 원더우먼은 여성의 힘을 상징하기 보다는 성적 타락의 상징으로 보였다. 특히 여성들만 모여사는 아마존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배트맨과 함께 동성애 코드로 읽히기도 했다. (배트맨은 사이드 킥인 로빈과 함께 등장한다는 이유로 둘 사이가 동성애 관계라는 일부 독자들의 해석은 꾸준히 존재했다).

원더우먼은 복잡한 캐릭터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여권운동의 상징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동시에, 이성애와 동성애, 심지어 다자연애의 역사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수퍼 히어로다. 하지만 현실 속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그 해석은 현재를 사는 독자의 몫이다.

image 사진=마스턴의 가족: 윌리엄 마스턴(가운데), 올리브 (흰블라우스), 엘리자베스(맨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