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의 덕업일치

스벅 다이어리 대신, 제 취향을 당신에게 팝니다

밀레니얼의 '덕업일치' (11) 1인 문구점 주인 이효은

정인선 2017년 09월 12일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해서 일기를 쓰게 되는 날은 잘 없다. 사람 마음은 간사해서, 힘든 일, 불행한 일, 속상한 일을 겪었을 때에야 일기장을 펼쳐 들어 글을 쓴다. "행복한 이유는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힘든 일은, (일기를 쓰며) 이유를 잘 찾는 게 도움이 되는 때가 많아요."

일기를 쓴다는 행위, 그것도 손으로 종이에 꾹꾹 눌러 쓰는 행위는 자신을 붙잡아야 하는 순간에 유용하다. 기록광을 위한 스테이셔너리(문구) 브랜드 'ALL WRITE'를 운영하는 이효은 씨의 말처럼.

이효은
29세
기록광을 위한 스테이셔너리 브랜드 'ALL WRITE' 디자이너/디렉터

이효은 씨는 12월 31일 생이다. 한 해가 끝나는 날 태어났다. 1년에 한 번씩 생일을 기념할 겸, 지나온 시간도 돌아볼 겸, 잘 한 일과 잘못한 일을 쭉 적어본다. 평소엔 일기를 꼬박꼬박 쓴다. 밤 또는 새벽 감성에 취하기보다, 이른 아침 카페에서 맑은 정신으로 쓴다. 고객들에게도 같은 방법을 권한다. 꼭 아침일 필요는 없지만, 일기쓰기를 통해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위로하고,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계획하고, 지금의 나를 직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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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다이어리를 안 들고 나온 날 쓸 게 엄청 많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들고 다녀요. 지하철에서도 노트를 펴놓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요. 자리가 없어서 서 있으면 핸드폰 메모장에 쓰고요."

ALL WRITE는 영어로 '기록광'이란 뜻이다.

대학생 때부터 자신만의 가게를 운영하고 싶다는 꿈은 있었지만, 그게 꼭 다이어리는 아니었다. 직접 디자인한 학과 체육대회 단체티를 친구들과 선배 후배들이 목이 늘어나도록 입고 다닐만큼 마음에 들어 했다. '아, 나중에 뭔가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스무 살 때부터 일기를 차곡차곡 쌓아 오던 블로그에 종종 직접 그린 일러스트를 올렸다. '일러스트로 에코백을 만들어 팔아 보라'는 구독자들의 제안으로 가방을 만들어 판매했다. 원단 가게부터 프린트집까지 발품을 팔며 어렵게 만든 가방이 '완판' 됐다. 2012년, 지금처럼 블로그 마켓이 흥하던 때도 아니었다. 용돈 벌이도 됐을 뿐더러, 내가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봤다는 친구들의 제보를 받는 게 신이 났다.

손으로 그리고, 호치키스로 찍은 첫 다이어리

워낙 문구 광이라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면 다이어리 코너를 한참 보는데, 정작 마음에 쏙 드는 다이어리가 없었다. 가계부며 주소록이며 실제론 잘 쓰이지 않는 부분들이 많은 복잡한 구성의 다이어리들 뿐이었다. '내가 만약 다이어리를 만든다면, 꼭 필요한 구성만 넣고 나머진 사용자가 채울 수 있는 다이어리를 만들어야지.' 생각했지만 쉽게 엄두는 안 났다.

스물 여섯 살이던 2014년, 버킷리스트에 오랫 동안 남아 있던 '다이어리 제작하기'를 지우고 싶었다. 종이에 손으로 직접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독학했다. 호치키스로 제본을 해 나만의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자신처럼 문구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새 다이어리를 사기까지 그 1년이 천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6개월마다 한 권씩 새 다이어리를 쓸 수 있게, '6개월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블로그에 올렸더니 "이런 거면 저도 살래요"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언니에게 300만 원을 빌려 다이어리 500부를 제작했다. '안 팔리면 친구들 선물하고, 내가 할머니 될 때까지 써야지' 하는 마음이었지만, 다행히 재고 없이 다 팔렸다. 이 때 만든 6개월 다이어리가 ALL WRITE의 첫 번째 제품이자 대표작이 됐다. 그 뒤로 체크리스트, 위클리플래너, 트래블노트, 투 두(To-do) 리스트 등 제품군을 하나씩 더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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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간엔 내가 직접 만든 물건만 있었으면

ALL WRITE에선 이효은 씨가 직접 디자인하고, 직접 제작한 제품들만 판다. 시즌별로 라인을 정해놓고 제품을 내는 큰 브랜드들과 달리, ‘어 이거 필요한데’ 하면 바로바로 디자인해 만든다. 이효은 씨의 상점에서 파는 제품 중 직접 만들지 않은 건 ‘제트스트림’ 볼펜 하나 뿐이다.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땐 주변에서 사입(대량생산된 제품을 떼어 와서 파는 것)도 하라는 조언도 많았다. 하지만 내 공간엔 내가 직접 만든 것들만 있었으면 했다. "내 제품들끼리는 다 잘 어울리는데 걔만 혼자 '왕따'가 될까봐 그런 것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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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CM, 1300K등 큰 온라인 쇼핑몰에 자신의 제품을 들이지도 않는다. 처음엔 제품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에 납품을 했다. 하지만 블로그나 SNS를 통해 알음알음 찾아오는 고객들과 달리 대형 온라인 몰 고객들과는 직접 접촉이 어렵다 보니 그들의 요구를 모두 맞추기도, 그 가운데서 ALL WRITE라는 브랜드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고민들로 시간을 보낼 바엔 제품 개발에 집중하자는 생각에 입점했던 곳에서 제품을 모두 뺐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에도 한 온라인 몰에서 입점 문의 메일이 왔지만 이효은 씨는 바로 거절했다.)

"그때 만약 성공을 했잖아요? 그러면 저는 진짜 거만해 졌을 수도 있고, 와르르 무너졌을 것 같아요. 제품도 나도 준비가 안 됐는데 그 상태에서 (사업이) 잘 돼버리면 진짜 휘청이잖아요. 어디서든 실수가 분명히 나올 거고. 근데 탄탄하게 뭔가 계단을 하나씩 갔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기록이 삶을 바꾸는 경험을 팝니다

이효은 씨가 직접 만든 제품을, 그것도 자신의 공간에서만 팔기를 고집하는 건 제품이 자신의 삶에 가져다 준 변화의 경험을 손님들에게 보다 가까이서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일기 쓰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하고, 제품을 사용하는 방법을 오프라인 상점을 찾아 온 고객들에게 일러 주는 이유도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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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간의 압박을 좀 받는 편이에요. 하기 싫은 일은 미루는 편이기도 하고요. 할 일이 많을 때 하루종일 계획 없이 분주히 움직이면, 다음 날 또 할 게 어차피 많거든요.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보이지가 않으니까 계속 뭔가 바쁘기만 하고 지쳤을 텐데, 기록으로 남겨서 '아 내가 오늘은 일곱 가지 일을 계획 했는데 이걸 다 했구나, 내가 나를 칭찬해 줄 수 있는 날이다'하다 보니 성취감이 생겨서 일을 더 열심히 하고, 뭔가 놓치지 않으려고 더 노력을 하게 되더라고요."

한때 브랜드 운영과 다른 일을 ‘투잡’으로 병행하느라 바쁠 때 만든 게 ‘투 두 리스트’이고, 평소에 돈을 많이 써 관리의 필요성을 느껴 만든 게 ‘캐시북(가계부)’이다. 너무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 가격이 높아지면 구매를 망설이거나 사 놓고도 쉽게 뜯어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 생긴다. 이효은 씨는 아끼고 쟁여 놓는 문구보다는 진짜로 기록을 하고 계획을 세우는 데 쓸 수 있는 문구를 만들고 싶었다. 또 제품을 사용하는 모습을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꾸준히 노출해, 고객들도 자신처럼 기록으로 인해 삶이 바뀌는 경험을 갖게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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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은 씨의 방에는 그때그때 디자인 중인 제품들의 시안이 가득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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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실제로 사용한 ALL WRITE 다이어리

일본 영화 속 구멍가게처럼

ALL WRITE의 오프라인 상점은 서울 서대문구 창전동,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도, 신촌역에서도 10분은 걸어야 올 수 있는 애매한 곳에 위치해 있다. 경의선 기차길 옆 골목길로 들어오면 작은 책방과, 꽃집, 칼국수집을 지나서, '은파피아노'라는 간판을 떼어넨 자국이 그대로 남은 카페가 나온다. 그 건너편 진녹색 외벽의 가게가 이효은 씨의 공간이다.

"처음 2년은 온라인 쇼핑몰만 운영했어요. 그 때 '내 제품이 잘 팔리기는 하는데, 대체 어떤 사람들이 내가 만든 다이어리를 사는 걸까?' 궁금했어요. 일본 영화를 보면 손님들이랑 되게 가깝잖아요.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이웃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저도 그런 로망을 갖고 있었는데, 처음부터는 아니어도 점점 자리를 잡아 가면서 실현돼 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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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찾아오기 어려운 골목길 구석에 자리 잡은 것도 손님으로 알게 된 맞은편 카페 주인이 "한 번 놀러 오라"고 해 와본 게 계기가 됐다.

이효은 씨는 상점을 찾는 고객들의 상담사 역할도 동시에 한다. 일기장에 적을 만한 고민을 이효은 씨에게도 나누는 거다. 제품을 사러 왔다가 퇴사 고민을 나누고, 그리고 몇 주 뒤에 밝은 얼굴로 다시 찾아와 트래블 노트를 사서 나가는 손님은 100이면 100 퇴사를 실행에 옮긴 거다.

정성스레 그릇을 포장하는 마음으로

카운터 앞에 손님들이 줄을 서도, 이효은 씨는 제품을 정성스럽게 포장한 뒤 고객의 손에 넘긴다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끔 고객이 "어차피 제가 쓸 거니까 포장 안 해 주셔도 돼요"라고 해도 꼭 포장을 해 준다. "자기한테 선물하는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포장을 하나하나 뜯을 때 뭔가 아까워하게 되고, 자기의 돈으로 샀지만 선물 받은 것 처럼 기쁘고."

몇 해 전 일본의 한 그릇 도매시장에 갔을 때, 50대 주인 아주머니가 뒤에 손님이 있어도 하나하나 차곡차곡 신문지로 싸 주는 모습을 보고 '아, 나도 나중에 상점을 열면 저렇게 해 줘야지' 생각했다. 체크리스트는 흰색 미분지에, 노트는 갈색 크래프트지 봉투에 넣는 등 제품마다 고유의 포장 방법도 따로 있다. ALL WRITE의 오프라인 상점이 문을 여는 금, 토, 일요일이면 제품을 사려는 사람과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작은 공간이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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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그릇 시장에서 느낀 무언가 선물 받는 기분을 사람들에게도 전해주려고 고집하는 건, 스타벅스 다이어리도 있고, 은행에서 주는 수첩도 있고, 연말이면 넘치는 게 다이어리인데, 그럼에도 자신의 제품을 사러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보답이다. 나만의 브랜드를 운영한다는 건 취향을 판다는 일이다.

사진=이효은 인스타그램, Deepr 이준용, 정인선
영상=Deepr 이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