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의 덕업일치

이번주에 해먹에 한 번도 못 누웠네,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밀레니얼의 '덕업일치' (13) 해먹 전문 브랜드 대표 서은혜

윤지원 2017년 11월 03일

주말이면 침대에 누워 아무 연락도 받지 않고 넷플릭스를 본다. 어딘가 불편해 누운 자세를 여러 번 바꿔본다.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은 등 뒤가 아니라 마음에서 느껴지는 거였다. 결국 찌뿌둥하게 굳어버린 어깨 근육을 부여잡고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 채로 월요일 출근할 수 밖에 없었다. 해먹 전문 브랜드 ‘나무사이’ 대표 서은혜 씨는 “스스로에게 쉼을 허용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진단했다.

서은혜
37세
해먹 전문 브랜드 ‘나무사이’ 대표

서은혜 씨는 다양한 ‘덕(덕질)’을 거쳐 왔다. 여러 일을 탐구하며 전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본인이 사랑한다고 확신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도 본인 스스로가 따라주지 않아서 접어야 했다. 그렇게 떠나보낸 그만의 ‘덕질’이 두 개나 된다. 은혜 씨는 “신념, 열정과 같은 단어는 이젠 조금 무섭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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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업일치는 열정과 신념만으론 안 되더라

서 씨의 인생 첫 번째 덕질은 대학교에서 복수전공한 미술사였다. 80대의 쿠바 할머니인 미술사 교수님을 만났는데 그분의 눈빛과 수업에서 ‘저런 분 같은 미술사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정이라 불러도 아깝지 않을만큼 빠졌던 미술사학 공부를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으나 교수님으로부터 '이 길을 계속하고 싶으면 돈이 있어야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현장의 좁은 취업길, 미래에 대한 교수와 선배들의 회의적인 태도, 어려운 집안 형편때문에 그렇게 첫 번째 꿈을 접어야 했다.

대학원 입학은 취소했지만 계약기간이 1년인 조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계속 대학원에 출입해야 했다. 남은 시간 동안 도서관에 파묻혔다. 그때 만난 것이 인생 두 번째 덕질인 대안교육이었다.

서 씨가 도서관에서 탐독한 책은 간디학교(97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대안학교)와 발도르프 교육(독일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만든 대안교육)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평소 기성 교육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도 했지만, 일단 본인부터가 치유가 필요했던 시점이어서 교육을 통해 힐링을 찾고 싶었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교사가 될 과정을 밟고 2008년, 대안학교 A에서 영어교사로 첫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폭식까지 하며 나를 괴롭혔던 시간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해 눈물 흘리며 떠나온 미술사학의 길과는 달리, 대안교육 교사로 취직까지 됐으니 '덕업일치'가 된 거였을까? 그렇지 않았다.

서 씨의 꿈을 이루는 길은 첫 단계부터 삐걱거렸다. 가족들은 맏딸의 첫 월급 80만원을 반대했다. 뜻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살아갈 조건이 안 된다는 거였다. 서 씨의 동생은 “엄마가 힘들게 유학까지 보내줬는데, 언닌 너무 이기적이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반대도 무릅쓰면서 기존 교육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옳은 길을 찾아왔다고 생각했건만, 대안학교 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저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X세대고 외국 유학도 다녀온, 말하자면 도시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A 학교가 있던 곳은 하루 버스가 4대 다니는 시골이었거든요. 시골살이가 좋아서 갔지만 막상 가니까 제 생각과 너무 달랐어요. 그 때 살던 집에서 쥐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요, 밤송이와 돌로 쥐구멍을 막아두면 쥐가 나오지 못한대요. 그냥 구멍을 막기만 하면 되는데 저는 이상하게 그걸 못했어요. 그냥 그때는 그게 너무 어려웠어요. 제 한계였던 것 같아요.

결국 대신 구멍을 막아준 동료 교사들이 서 씨에게 물었다. “대체 이런 걸 너는 왜 못하니? 이런 것도 힘들어하는 네게 시골에서의 공동체살이가 맞겠니?”

“너무 원해서 간 곳이었는데, 그땐 어리기도 해서 남들이 저를 바라보며 평가하는 것에 상처를 받았어요. 게다가 한 동갑내기 친구는 저와 다르게 씩씩하게 잘 살더라고요. 그들과 다른 나를 보면서 왜 나 혼자만 못하지 자학이 심했어요.”

차라리 있기 싫은 곳이거나 억지로 끌려간 곳이라면 그렇게 괴롭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길이 아닌가 보다' 손 탈탈 털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위의 반대도 물리치고 제 발로 걸어들어온 곳,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가치를 구현한 공동체에 스스로가 부족해서 맞지 않는 사람이란 생각은 더없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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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는 ‘사회적으로 숭고한 위치’를 지닌 곳이다. 사람은 큰 가치를 지향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쉽게 '아니다'란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그렇게 그곳에 맞는 사람이 되고자 3년을 버텼다. 내적 갈등은 직접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폭식의 형태로 드러났다.

“제가 좋아하는 우리밀 발효종 빵 같은 게 없죠 거긴. 슈퍼마켓에 맘모스빵이라든가 매점빵을 팔거든요. 몸에도 좋지 않은 그런 빵들을 사서 밤마다 먹었어요. 근데 이런 얘길 누구한테 해요. 통화로 ‘엄마 나 쓰레기같은 음식 사서 밤마다 폭식해.’ 어떻게 말해요. 스스로 짐승같다고 여겼어요. 아침마다 출근할 때는 학교 앞을 그대로 지나쳐서 달리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근데 못하죠. 애들이 나를 기다리니까. 그렇게 학교에 들어간 서은혜는 다른 서은혜예요.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그때의 저를. '은혜 쌤 우울증 있었어?' 하고 놀라겠죠."

포기는 누구에게나 힘들지만, 나를 포기하는 것이 제일 힘들다

이 이상 스스로를 잠식해가단 딱 영혼까지 죽겠다 싶었을 때,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만두겠다 말하고 떠나 오자 거짓말같이 폭식이 사라졌다. 친구들이 ‘너도 영어로 돈 좀 벌어라, 과외나 영어유치원을 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도저히 사교육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았다.

두번째 대안학교인 ‘발도르프 학교’에서 새로이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한 번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더욱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애썼다. 과한 열정은 때론 본인의 발목을 걸기도 한다. 2년째 되던 해, 학부모와 문제가 생겨 결국 두 번째 학교도 그만두게 된다.

“결정은 제가 한거죠. 더 싸워가면서 해나갈 수도 있었지만 2년 간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상황이라 항복한 거에요. 그러고 나니 마음의 병에 걸렸어요. 홧병. 발도르프는 원래 한 아이에 대해 교육을 8년 동안 해요. 8년간 맡아서 교육해야 하는 아이들인데 내가 못나서, 충분치 않아서 놓아버렸다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덕업일치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누군가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직 '덕질'과 업을 일치시킬 준비가 돼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미술사학을 향한 서 씨의 덕질처럼 외부의 경제적 상황이 원망스러워 포기할 때도 있다.

이번엔 달랐다. 내가 몸 바치고 싶은 것이 명확하고 열정이 준비도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현장에서는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문제는 나'라고 생각했다. '좀 더 버티면 되겠지',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되겠지’라며 몇 년 간 끌어오던 포기를 선언할 때, 서 씨의 마음은 그야말로 병들기 시작했다.

휴식은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

교사인 친구가 아이들을 인솔해 인도에 삼 주간 간다고 들었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같이 떠났다. 원래는 인도 남부의 오로빌 마을의 사다나 포레스트라는 비건 공동체에서 일주일 동안 봉사활동을 하고 북서부인 맥그로드 간즈에 가는 계획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몸은 병이 났고, 아픈 서 씨는 오로빌에 남겨졌다. 그렇게 인도에서 예상치 못하게 반 년을 지냈다.

"'마티르 만디르'라 불리는 성스러운 장소가 있어요. 매일 아침 눈 뜨면 거기 가서 명상을 했어요. 메인 챔버(방)에서 이삼십분 명상을 하는데 갑자기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네가 무엇을 해도 다 괜찮다, 유유(서은혜 씨가 스스로에게 직접 지어준 이름)야.' 우주의 어머니, 엄마의 자궁같은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어요. 그곳에선 뭘 해도 안전하고,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다 괜찮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터진 눈물은 한달 반 동안 계속됐다. 대안학교에서 있었던 일뿐 아니라 생애서 가졌던 모든 아픔들을 눈물로 풀어냈다. 45일을 꼬박 울자 주변이 보였다. 이웃집 친구가 말했다. “유유야, 네가 쉬고 싶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쉬어도 좋아.” 단지 그 집엔 와이파이가 있었기 때문에 놀러 갔다. 거기에서 해먹을 만났다.

“사실 해먹을 인도에서 처음 만난 건 아니었거든요. 예전에 미국에서 대안학교 탐방 여행을 할 때 직접 만들어서 팔았던 경험이 있어요. 근데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어요. 돈도 없는데 여행은 어떻게 하나, 한국 돌아가면 뭘 하며 살아야할까 고민이 많으니 해먹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어요?”

그래서 해먹은 제게 소중해요

인도에서 처음 해먹에 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해먹에 누워서 와이파이로 음악을 들으며 뒹굴거렸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 아직도 고생하고 계신데 내가 뭘 잘했다고 이렇게 좋은 햇살에 누워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거지.’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나름 열심히 살았어. 나도 휴식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순간, 정말 해먹이 편해졌다.

해먹은 몸뿐이 아니라 마음도 같이 누워야 해요. 그 때 처음 나뭇잎이 어떻게 바람에 흔들거리는지, 어떤 새들이 우리 정원에 오는지 보이더라고요. 하와이에, 세부의 화이트 비치에 누워있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내 마음이죠. '너 열심히 살았잖아, 아니 열심히 안 해도 한 번 쉬어갈 수 있는 거 아냐?’ 스스로 마음에 쉼을 허용해야지 쉴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준 게 해먹이에요. 그래서 해먹은 제게 소중해요.”

한달 반 동안 울어서 상처가 씻겨간 서 씨는 휴식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순간온 쉬어도 좋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 바로 해먹이었던 것이다. 서 씨는 해먹(과 와이파이)을 내어준 친구를 따라 해먹 공장에 방문했다. 유기재배한 면을 천연 염색해서 베틀로 해먹을 만들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에 또 한 번 반했다. 그렇게 해먹과 해먹의 가치를 한국에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고, 서 씨의 사업도 시작됐다.

건강한 해먹으로 건강한 쉼을

사실 한국은 해먹에 적합한 시장이 아니다. 인지도도 낮고, 설치할 만한 마땅한 공간이 집 안이나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셋방살이 하는 사람들에겐 벽에 못을 쳐 해먹을 거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 서 씨가 판매하는 해먹은 기계식 제조법이 아니라 현지 노동자들이 유기농 목화로 만든 섬유에 천연 염료로 염색하는 ‘핸드 우븐’ 제조공법이기 때문에 가격이 싼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업을 시작한다 했을 때, 지인들은 모두 반대했다.

“제 해먹이 저렴한 건 아니에요. 돈이 많은 사람은 쉽게 살 수 있겠죠. 근데 돈이 있고, 이걸 걸 수 있는 공간이 있어도 누울 시간이 없는 사람은 해먹을 진정으로 향유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사실 해먹의 유무가 아니라 진정한 휴식을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근데 해먹이 중요한 기준점이 돼요.'이번주에 내가 한 번도 못 누웠네, 내가 잘 살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체크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건강한 해먹을 통해 건강한 쉼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좀 더 효율적으로, 좀 더 많이, 좀 더 잘 하기를 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휴식이나 해먹이 어울리지 않다는 것은 서 씨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 씨는 더더욱 자신의 해먹이 미래 사업이라고 말한다.

“사업 도와주는 지인들이 ‘하나도 못 팔았다’고 걱정할 때마다 그렇게 말해요. ‘’나무사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사업이야, 우린 해먹을 향유할 수 있고, 쉴 수 있는 사회로 나가가야해!’라고 말이에요. 이런 진정한 휴식을 좀 느꼈으면 하는 청년들에게 해먹은 잘 살 수 없는 가격이죠. 그래서 저는 해먹과, 해먹을 통한 쉼의 의미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순환 경제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 봐요. 해먹이 필요한 제 친구들 - 농부와 예술가들, 그리고 해먹 생산자들 사이에 어떻게 수익과 휴식이 순환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미래사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이나, ‘순환을 생각하지만 순환될 판매수익이 아직 없다’며 호탕하게 웃는 모습에서 같이 웃음이 나왔다. 그제야 ‘열정이나 신념이 요즘은 무섭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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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기적이고, 그게 나다

웃음이 너무 편안해보여서 ‘요즘 행복하시냐’고 물었다. 그는 예의 그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네, 요즘 전성기에요. 정확히 보셨어요. 근데 뭐가 잘 돼서 행복한 게 아니고 요즘은 마음이 편안해요. 내 안에는 전쟁이 많았어요. 20대 때는 자기비하가 심했어요. 스스로의 기준이 높으니 잘 해도 ‘너 왜 그거밖에 못해, 너는 왜 남들 하는거 안 해’하고요. 근데 지금은 전쟁이 많이 잦아들었어요. 물론 두려움은 있죠. 여전히 걱정도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그만큼 바닥을 친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여기서 그는 의외의 소리를 했다. 자기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은 좋아하는 일을 굉장히 이기적으로 꾸준히 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거다. 이기적인 사람으로 그를 평가하기에는 그가 얻은 상처가 많았고, 평탄히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삶을 산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 씨가 스스로 말하는 이기적이란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뜻과는 달랐다.

"이기적인 부분에 대해 제가 노력한 건 없어요. 태생이 그렇게 태어났어요. 저는 하려고 해서 이기적인게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필요한 것,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해서 이기적인 거예요. 돌이켜보면 거기에 누군가의 희생이 분명 있었죠. 하지만 누군가를 탓하진 않아요. 다 나 때문인 거니까요. 이기적인 삶이 되게 자유로울 것 같죠? 나의 책임 때문에 많이 괴롭고 힘들어요. 다만 그것이 예전엔 나를 칼로 찌른 거라면 지금은 많이 찌르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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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마 안 변할 거에요. 계속 이기적으로 살 거에요. 부모님에게는 나쁜 장녀, 동생에게는 언니같지않은 언니로 남아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아마 남을 탓하지 않고 저로 다시 돌아오겠죠. 내가 나로."

해먹에 누운 다음부터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과 새와 고양이를 보는 눈이 트였다는 그는 말하면서도 자주 걸음을 멈췄다. 한창 낙엽이 떨어질 때라 바닥엔 색색의 낙엽들이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집어든 것은 일곱 갈래 잎은 빨갛지만 아직 덜 물들어 잎맥에 고운 초록색이 남아 있는 촉촉한 단풍잎이었다. 다음에 만날 땐 ‘대표님’이 아니라 ‘유유' 라고 불러달라며 낙엽을 손에 쥐고 그는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