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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면 법을 바꾸라고 해서, 진짜 바꿨다.

시민입법 1호 법안 '신입사원 연차휴가 보장법' 제안부터 본회의 통과까지

조경숙 2017년 11월 13일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땐 찌는 듯한 여름이었다. 상반기 공채에 지원해 7월부터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3개월 정도 회사와 교육장을 오가며 교육을 받았는데, 회사 선배들 모두 긴 여름 휴가를 갈 때 나는 언제나 사무실 붙박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팀장님이 지나가며 무심하게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휴가를 쓰지 그래?”라고 말을 던졌을 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팀장님이 이야기한 것이므로 휴가를 내야 할 것 같은데, 내게 있는 연차는 2년 동안 나누어 써야 하므로 아끼고 또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1

회식은 똑같이 했는데 신입사원인 나만 그대로 출근

휴가가 없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때는 회식 다음 날이었다. 나도 술을 좋아했고, 내가 속한 팀 자체가 회식을 과하게 달리기로 유명하기도 했다. 막걸리, 소맥, 사케 등 주종을 섞어 3차 정도는 기본이었고, 이어 노래방까지 가는 날엔 세네 시에 귀가하기도 했다. 술과 사람을 좋아해서 자리가 워낙 즐겁긴 했지만, 일주일에 서너 번 있는 회식을 반차 한번 없이 견디기엔 너무 고됐다. 같이 새벽녘까지 술 마신 선배들은 다음 날 어김없이 휴가를 냈는데, 나는 꾸역꾸역 나와서 편의점 라면으로 해장을 하고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딱 하루, 아니 딱 반나절만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늘 간절했다.

신입사원 시절엔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꼼수'가 있었다. 회사에서 약간의 편의를 봐주어서 내년의 연차를 최대 5개까지 ‘당겨쓰기'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 2년 동안 15일의 연차만 쓸 수 있었지만, 3년 차에 생기는 16일의 연차 가운데 3일 정도를 당겨 써서 3년 차엔 13일을 받고, 2년 차까지 18일의 연차를 사용했다. 그래도 연차가 부족해 허덕이긴 했지만 나름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문제가 된 건 이직한 이후였다. 이직한 때 나는 돌쟁이의 엄마였다. 아이가 돌이 될 무렵에는 으레 ‘돌 앓이'를 한다는데, 우리 아이가 딱 그랬다. 생후 12개월을 전후하여 계속 열이 39도를 웃도는 열병이 자꾸 재발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는 당시 연차를 전혀 낼 수 없었고, 아픈 아이를 계속 어린이집에 둘 수도 없으니 내가 돌봐야 하는데 내게 허용된 연차는 ‘만 2년 동안 15일의 연차'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 회사에서는 ‘당겨쓰기' 도 불가했다.

법 바꿔 오면 연차 쓰게 해 주지~

이직한 회사에서 야외 워크숍을 갔을 때 회사의 고위 간부가 우리 팀과 동행한 일이 있었다. ‘어렵고 힘든 건 없냐'는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연차 이야기를 꺼냈다. 이전 회사에서는 연차가 그나마 당겨 쓰기가 가능해서 버틸 수 있었는데 여기는 칼같이 2년에 15일밖에 쓸 수 없어 다소 힘든 면이 있다고 토로하니 간부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회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회사라 그런 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억울하면 근로기준법을 바꿔야죠.”

회사의 책임을 피하려고 쉽게 던진 말이겠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선 무언가 화르르 지펴졌다.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저 사람의 태도 때문에 오기가 생긴 것도 있었지만, 어차피 모두 다 연차로 고생하는 거 각자 회사에서 아등바등하느니 법을 찾는 게 느리더라도 옳은 길일 것 같았다.

똑똑, 입법부 문을 두드리다

법을 바꾸고 싶으면 새로운 법을 발의하여 입법해야 한다. 이 일을 하는 기관이 국회고, 국회의원이다.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이지만, 다행히 내겐 한 번 접촉한 선례가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겪었을 때 이에 대해 의원실에 민원을 넣었던 경험이 있었다. 보좌관에게 연락을 받아 상담을 받고, 보좌관도 회사의 인사팀을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내가 복직하지는 않았지만, 회사 안에서 최소한 같은 부당해고가 반복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그 당시의 경험이 있어서 그랬는지 이번에도 국회의원실이 굉장히 멀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일단 그때 만났던 보좌관에게 다시 한번 연락해 입법을 제안할 수 있는 창구가 있는지 문의했다. 보좌관이 친절하게 안내해준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해당 상임위의 국회의원실에 이메일을 보낸다. 두 번째,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국회의원을 만나 제안을 한다.

두 가지를 다 해보기로 했다. 처음에 내가 만들고 싶었던 법안은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못하는 주요 전염병에 걸릴 경우 부모에게 연차 1일을 지급하는 법’ 이었다.

농가진, 구내염, 독감 등 전염성이 강한 질병에 걸릴 경우 어린이집에 최소 4일 이상 등원하지 못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지 못하면 당연히 집에 혼자 둘 순 없으므로 부모 가운데 누군가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데 부모 양측 다 연차가 없다면?

오도 가도 못하는 이런 상황을 방지하고자 법을 제안해보려고 보건복지 상임위 의원실에 차례차례 메일을 보내고 지역 국회의원실에도 국회의원과 만남을 신청했다. (한 달에 한 번 지역구 국회의원과 지역구민의 만남 행사를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전화로 신청하면 만날 수 있다.) 그러던 중 정의당 윤소하 의원실에서 먼저 연락이 와 좋은 제안이라며 발의해주었다. 발의만 했을 뿐인데 입법까지 된 것처럼 가슴이 뛰었지만, 입법이 되지는 못했다.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한 번 검토가 완료된 법안은 다시 논의될 수 없다. 다시 처음부터 만들어서 올려야 한다. 이 법은 소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시행될 여지가 없기에 입법에 의의만 두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좋은 제안이긴 한데, 전경련 산을 넘을 수 있을까요?

다시 근로기준법 조항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1년 차에 쓴 연차를 2년 차에 지급하는 연차 15일에서 갈음한다' 조항을 삭제해달라고 의원실에 메일을 보냈다. 대부분 답변이 오지 않았고, 딱 한 군데에서 전화가 왔다. 모 의원실의 비서관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좋은 제안이고 꼭 고쳐져야 하긴 한데, 이거 올라가면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엄청 난리 칠 거예요. 통과될 가능성이 없어요.”

젠체하는 피드백이 아니라 걱정과 우려가 담긴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허망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가 우연히 SNS에서 ‘국회톡톡'이라는 서비스 홍보 글을 발견했다. 시민 누구나 입법을 제안하고 서명 1,000명을 달성하면 국회의원에게 직접 발의 요청이 가는 서비스라고 했다. ‘전경련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이 여전히 귓가에 생생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한번 써보기로 했다.

image 사진=국회톡톡 웹사이트 캡쳐

image 사진=국회톡톡 웹사이트 캡쳐

국회톡톡에 제안을 올린 게 2016년 10월이었다. 그로부터 일 년여가 지난 11월 9일, 기적 같이 이 법은 본회의까지 통과해 마침내 입법됐다.

아아 이거슨 운명, 전경련이 해체되고, 보수 여당이 무너졌다

누군가는 ‘전경련 때문에 안될 것'이라고 전망했었는데, 그 사이 갑작스레 그 견고해 보이던 전경련이 해체되고 보수 정권이 사상 초유의 스케일로 무너져 내렸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지면서 ‘신입사원 연차 법안'에 맞서 싸울 보수 부대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기세등등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물론 국회톡톡에 올린 것만으로 많은 것이 뚝딱 해결된 건 아니었다. 일단 기한 내에 천 명의 서명을 달성하지 못할 것 같아 전전긍긍하며 온갖 카톡방과 육아/직장인 카페를 드나들며 서명 독려 글을 정말 열심히 퍼 날랐다.

image 사진=국회톡톡 웹사이트 캡쳐

빠띠와 함께 국회톡톡을 기획한 정치 스타트업 '와글'의 국회톡톡 운영진들이 온갖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옮겨주며 홍보했다. 여러 손이 부지런히 움직여도 칠백 명이 채 안 되어 좌절 직전이었는데, 여기에 공감한 한 지인이 트위터로 이 내용을 공유하면서 순식간에 서명 수가 천 칠백 명을 돌파했다. (역시 트위터!)

국회의원이 매칭되는 과정 또한 ‘자동’이 아니었다. 메일은 바로 발송됐지만 역시 국회톡톡 운영진들이 일일이 국회의원실 문을 두드리며 육성으로 제안을 전달했다.

image 국회톡톡 운영진들이 국회의원실 문을 일일이 두드리며 법안 발의 동참 제안을 했다. 국회톡톡 웹사이트를 통해 실제 법안 발의에 참여한 의원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사진=국회톡톡 웹사이트 캡쳐

주변에서 축하를 건넬 때마다 ‘나 혼자선 이런 결과를 못 냈다.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택이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건 체면치레나 겸손이 아니라 정말 무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나 혼자선 할 수 없었다. 이건 전경련을 해체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전에 물러나는 일들- 모든 게 기적처럼 맞물려서 통과된 법안이었다.

국회톡톡과의 인연이 이어져 지금 나는 국회톡톡을 공동기획/개발한 ‘빠띠'의 멤버로 일하고 있다. 아직 개정된 신입사원 연차법이 시행되기 전이지만, 연차를 아낄 필요 없이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면서 일을 한다. 이모저모로 연차법 개정안이 내게 많은 것을 남겨준 셈이다.

과제: 선한 국회의원 한 사람의 의지에 기대지 않으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남는다. 연차법 개정안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건, ‘입법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뭘까'에 대한 것이었다. 국회의원과의 간담회에서도 그다지 명쾌하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안달복달하며 손꼽아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법으로 공포되는 만큼 전문가들의 의견뿐 아니라 여러 의원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지극히 동의하지만, 국민이 손쓸 도리 없는 프로세스라는 게 한편으로는 ‘왕정 정치'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저 신문고를 울린 정도이고, 왕들이 알아서 처리해주십사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백정 같았달까. (국회의원이나 국회의원실 직원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특히 이 법안을 대표 발의한 한정애 국회의원은 정말 감동적일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럼 그 외의 방법이 뭐가 있냐고 질문이 올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 아직 답은 못 찾았다.

법안이 발의되는 시기와 타이밍 역시 고민되는 주제다. 이번 연차법 개정안이 운 좋게 시류를 탔다면, 운이 좋지 않지만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예컨대 지금 단식 한 달이 넘어가는 제주 제2공항 문제나 일각에서 목이 터지게 외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 모두 개별적으로 중요한 사안이지만 큰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이게 단지 ‘캠페이너'들의 전략적 문제일까? 아니면 여러 캠페인이 서로 각개전투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차원의 문제일까.

다행히도 내 주변엔 이런 질문들을 이전부터 던져 온 동료들이 있다. 연차법 개정안이 입법되기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동료들과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질문하고 답을 고민하려고 한다. 나는 정말 모두가 국가의 주인인 사회를 꿈꾼다. 그러자면 ‘모두', ‘국가', ‘주인', ‘사회' 모든 단어에 계속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모두'에 누락된 사람들은 없는가, ‘국가'는 어디까지 일을 하나, ‘주인 됨’은 무엇인가 등등… 하나하나 어렵고 힘든 주제인 건 분명하다. 다만 이 질문들을 각자 혼자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에서 지금 상태는 희망적이다.

기사를 다 읽으셨나요? 당신의 다음 반 발짝을 고민해 보세요.
✔ 국회톡톡 신입사원 연차 보장법 입법에 참여한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정의당 이정미 의원에 대해 더 알아보세요.
✔ 다른 시민들은 어떤 법안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국회톡톡 웹사이트에서 확인하고, 입법 제안에 동참해 보세요.
✔ 시민 직접 행동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다면, 우주당 슬랙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 조경숙 님이 추천하는, 관심이 필요한 프로젝트 살펴보기
- 가브크래프트, 제주 제2공항 입지 및 건설 계획의 원점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 우주당, 정치야 말좀 들어!


  1.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1년차 신입사원의 경우 한 달 일할 때마다 하루씩의 휴가를 받을 수 있다. 다음 해에 지급되는 15일의 유급휴가를 당겨 써야 하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