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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내 미래를 그리는 데 참고 삼을 수 있는 여성이 가까이 있다면? A. 언니 믿고 달리겠지요.

'더 많은 여성이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 시간' 온라인 리스트업 및 설문조사

정인선 2018년 01월 22일

당신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0, 30대 여성이다. 3년 뒤, 5년 뒤, 그리고 10년, 20년 뒤를 각각 떠올려 보라. ‘그때쯤 나는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어’라고 떠올릴 수 있는 여성이 주변에 있나?

10년 뒤, 20년 뒤에 닮고 싶은 롤모델을 갖는 것과, 실제로 가까이서 보고 배우며 당장 2, 3년 뒤 미래 계획을 세우는 데 참고로 삼을 수 있는 선배를 갖는 것은 서로 약간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주로 ‘롤모델’로 불려 온 여성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대단한 성과를 낸 아웃라이어에 가까웠고, 대다수 여성에겐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육아하는 것 자체가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김은지 독자, 29세).

“지극히 평범한 내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나 김영란 전 대법관이 될 수는 없을 테니 곁에서 보고 따라갈만한 ‘그냥’ 여성 대리, 과장, 부장님이 점차 많아지면 좋겠습니다.”_김은지

추미애 김영란 말고, 그냥 대리님 과장님이 있었으면

지난 11월부터 약 2개월 동안 디퍼는 <더 많은 여성이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 시간> 온라인 리스트업 및 설문조사 프로젝트 및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민단체, 미디어, 사회적 경제, 문화예술, 의료, 공직, IT, 교육, 서비스업 등 분야에서 일하는 32명의 독자가 참여했다(여성 31명, 남성 1명). 이 중 7명은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은 ‘준비생’, 16명은 일을 시작한 지 1년~3년 차, 3명은 3~7년 차였고, 7년~10년 차는 2명, 10년차 이상은 1명이었다(무응답 3명).

그나마 3년 뒤, 5년 뒤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답한 건 32명 중 25명이었다. 하지만 10년 뒤, 20년 뒤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16명이었다. 표본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세 명 중 두 명 이상에서 두 명 중 한 명으로 줄어든 수치다. 아래는 두 번째 질문에 ‘없다’고 답한 독자 몇 명의 이야기다.

  • “남성만 떠오르고 제 기준에서 여성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ㅠ” _1년 차 콘텐츠 스타트업 종사자
  • “솔직히 말하면 없습니다. 회사 자체는 사원은 여초여도 당장 고갤 들어 위를 보면 일단 여성이 없습니다.” _2년 차 언론계 종사자
  • “(10년, 20년 뒤가) 아득하다.” _9년 차 의료계 종사자
  • “20대 후반인데, 20년 뒤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_6년 차 프리랜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앞선 두 문항에서 롤 모델이 ‘있다’라고 응답한 사람들도 대부분 ‘롤 모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느끼는 이유’를 묻는 문항에 무언가 응답을 적어 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보고 배울만한 여성 선배가 주변에 없는 가장 큰 이유로 ‘결혼, 육아, 출산 등으로 인한 경력단절’을 꼽았다(10명). ‘직장 내 유리천장’이 그 뒤를 이었다(5명).

  • “학부생때는 잘 와닿지 않았는데 대학원에 와보니 결혼 육아 등에 대해 여자 대학원생에게 가해지는 무언의 압박이 엄청 심하다는 것을 주변 선배들을 보며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ㅜㅜ 그리고 여자 교수님을 좀 보고 싶어요... 다 남자교수님이야..” _3년차 대학원생
  • “먼 미래를 생각했을 때 롤모델이 없는 것은 유리 천장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고위 공직자 비율이 매우 낮고, 이미 존재하는 공직자는 그 존재를 외부에서 인지하기가 어렵습니다.” _0년차 공무원
  • “고용에서의 성차별, 고용 후 결혼 및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임금 차별은 이 모든 것의 전제이자 결과고요, 유리천장도ㅎㅎ 물론 성차별적 발언을 포함한 성폭력도요^~^ 이 모든 것의 전제이자 결과” _2년차 언론계 종사자

이밖에 교육, 미디어 환경 등을 꼽은 답변이 있었다.

  • “기회 부족, 그리고 감히 쉽게 용기 낼 수 없게 만드는 사회 구조” _1년 차 콘텐츠 스타트업 종사자
  • “남성 모델에 집중되어 있고 그렇게 학습했다.” _9년 차 의료계 종사자
  • “미디어가 성공한 여성을 조망하는 빈도와 스케일이 너무 작아서.” _3년 차 금융계 종사자
  • “일하고 있으나 나설 기회가 없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많은 것 같다.” _8년 차 교사
  • “나와 비슷한 시기(20대 후반)와 환경(지방 거주, 무경력)을 이겨낸 롤모델로 삼을 만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_학생
  • “롤 모델에게 롤 모델이 없었을 것 같음” _2년 차 언론계 종사자

살아남은 사람은 둘 중 하나

중소기업에서 1년 반 정도를 일하다 시민단체로 자리를 옮긴 지 1년째인 이주영(여성, 20대 후반) 씨는 닮고 싶은 사람으로 여성운동계의 리더 한 명을 꼽았다. 그러면서도 이 씨는 “여성들이 (경력단절을 경험한 30, 40대 여성뿐 아니라 20대 청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분야에 대해 역량을 강화할 기회가 너무 없다.”고 답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이 씨는 학과에서 매년 여는 ‘선배와의 만남’에 4년 내내 참석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온 여성 선배는 단 두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전문 자격증을 가진 이였다.

“(대학교에 다니던 때부터) 여자 선배를 볼 수 있는 자리 자체가 많지 않았어요. 취업을 못 했거나, 공식적인 자리 와서 이야기할만한 자리에 있지 못한 사람들. 나이 차면 결혼하고. ...중략... (살아남은 사람은) 둘 중 하나예요. 남성화되거나, 남성 중심적 문화 속에서 나름의 방식을 찾았거나.”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언니’를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환경은 여성 청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정모(여성, 29세) 씨는 오랫동안 준비하던 고위 공무원 시험에 최근 합격했다. 그런데도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처음 시험을 준비할 땐 “(시민) 한 명 한 명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나름의 사명감”이 있었다. 지망하는 부처도 뚜렷했다. 하지만 2년 뒤 실제로 희망 부처에 지원할 때도 처음 시험을 시작할 때와 같은 부처를 희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몸 편한 곳에 가는 게 맞는 걸까 고민이 된다.

“‘여성 공무원’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있다고 해도 강경화 외교부 장관 정도?”

큰 기업의 법무팀에서 일하다가 작은 브랜딩 회사로 자리를 옮긴 지 1년째인 권해솜(여성, 27세) 씨는 자신을 “일 욕심이 많은 스타일”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완전 남초 회사”였던 이전 직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일 욕심이 사그라지는 순간이 많았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여성 직원들은) 차장, 과장을 하고 나면 다 그만둔다. 해솜 님도 그럴 거다.’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러면 ‘나도 일하다가 십 년, 십오 년 지나면 그만두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구나’하고 생각하게 됐다.

권 씨는 사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여성 선배를 찾아가 물은 적이 있다. “선배의 꿈은 뭐예요?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돌아온 답은 이랬다.

“처음에 입사할 때는 무조건 임원까지 하겠다 독한 마음 먹고 왔는데 결혼하고 애 낳고 이러다 보니까 그냥 회사에서 붙어있다가 부장이 안 되면 차장까지 하다가 그만두는 게 그냥 목표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저에게 ‘너는 그러지 마, 너희 세상은 바뀌었잖아’라고 하시는데, 그게 여성들이 되게 많이 듣는, 딸에게 엄마가 말하는, '딸은 그렇게 살지 마’ 하는 이야기랑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디퍼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Q. 내 미래를 그리는 데 참고삼을 수 있는 롤 모델이 가까이 있다면, 내 삶이 어떻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A.

  • “신화화된 동경이 아닌 아주 구체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 _0.5년 차 국회 비서
  • “박완서 작가의 첫 작품이 40세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기 전과 후 실제로 내 삶이 바뀜. ‘나 서른 먹도록 뭐했지? 어서 뭔가를 이뤄야 해’라는 매일 들던 불안감이 사라짐. (이전까지는) 40대 여성이 지워져 있다고 생각했음.” _2년 차 UX 디자이너
  • “뭔가 포기하는 걸 막아줄 것 같네요.” _2개월 차 IT 기획자
  • “포기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익힐 수 있을 것 같다. 성장 없는 삶이야말로 불우한 삶이라 생각하는데 롤모델은 꼭 롤모델처럼 되겠다는 다짐과 상관없이 나를 성찰하고 성장하는 자극을 끊임없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_5년차 시민단체 활동가
  • “언니 믿고 달리겠지요. ‘하면 되는구나’라는 선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데, 그 선례는 어떤 분야에서건 여성이면 되는데 대기업 직원 20%만이 여성이고 임원으로 가면 2%라는 충격적인 수치가, 과연 내가 여기서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할 겁니다. ‘되는 여성’이 많아지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다음 세대가 더 많이 ‘되게’ 만들겠지요!” _9년 차 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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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Grace Heejung Kim
이 기사는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계속 설치는 백앤백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