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우리가 함께 주거 상상력을 기르고 나누는 법

Deepr와 민달팽이유니온의 지난 5개월을 돌아보며

윤지원 2018년 01월 26일

자기 일이 아닌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무관심합니다. 내 문제만 해도 바쁜데, 다른 데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제게 주거 문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당장 나에게 영향을 주는 일도 아닌데, 관심을 가지려고 하다가도 발음하기도 어려운 용어들 때문에 번번이 진입장벽에 막혔죠. 기사 ‘언젠가 독립한다고? 당신의 그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에서 정인선 기자도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민달팽이유니온의 활동을 알고 그 취지에 공감했지만 가입하거나 후원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세입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고.

저 역시 주거 문제에 무관심했습니다. 초·중·고를 집 3분 거리에 있는 학교로 다녔고, 대학은 지하철 환승 한 번 만에 갈 수 있었죠. 애초에 자취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전세와 월세가 어떻게 다른지도 몰랐고, '천에 오십(보증금 1000만 원, 월세 50만 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나에게 필요해서라기보단 남들이 집 얘기할 때 알아듣기라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때부터 공부하듯이 아파트 기사를 밑줄 쳐 가며 읽고,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분석한 글을 부러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통 읽히지 않더군요. 최신 부동산 정책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지식은 알아 둬야 할 텐데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멈춰서 네이버 사전을 켜서 모르는 용어를 검색해야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거 문제에 대해 공부하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가 아니니까,’ ‘좀 더 커서 필요하면 알게 되겠지?' 스스로 변명처럼 했던 말입니다.

Deepr와 민달팽이유니온은 8월부터 10월 사이 다음 스토리펀딩 ‘튼튼한 임차인의 필수품 원룸상식사전’ 프로젝트를 함께했습니다. 7화에 걸쳐 임대인과 청년 임차인 간 불균형을 맞춰주는 공정한 계약서의 중요성과 주거에 대한 청년들의 상상력에 대해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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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펀딩 '튼튼한 임차인의 필수품 원룸상식사전' 기사 다시보기>
1화 원룸 계약하는데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2화 원룸상식사전, 이래서 만들었습니다
3화 아는 척 잘 하는 친구 '주거상담사'
4화 집주인과 나, 불화는 필연일까?
5화 계약서 쓰는 데 '1시간 30분' 걸렸어요
6화 '자취=원룸' 공식을 깨다
7화 사적이며 공적인 공간 '남의 집 거실'
번외편 언젠가 독립한다고? 당신의 그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
독자 구현모 님의 후기 가장 사적이고 친절한 저널리즘, 원룸상식사전
[미디어현장] 두 ‘자취알못’의 원룸상식사전 취재기: 청년의 불행을 전시하는 ‘청년 이야기’는 그만

민달팽이유니온과의 첫 미팅이 기억납니다. 계약서나 주거권 등 법률적이고 상세한 내용은 민달팽이유니온이 소개할 테니, Deepr는 주거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역할을 맡아달라 했습니다. 그때 처음 들었던 단어가 ‘주거 상상력’이었습니다. ‘주거’란 단어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상상력’이란 단어까지 덧붙여지니 처음엔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내 집’이 아닌 부모님 집에서 사니까 내 공간이라는 인식을 한 적도 없었고, 방은 상상과 발전의 장소라기보단 일이 끝나면 지쳐 누워 쉬는 공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취재하러 다니고 인터뷰이들을 만나면서 그 상상력이란 것에 대해 조금씩 느끼게 됐습니다. 공간에도 역할과 기능이 있고, 사람과 공간이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일 년 살고 나가는 원룸일지라도 원하는 대로 인테리어를 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서도 알게 됐고, 목적을 갖고 공간을 변화시키다 보니 자신의 삶도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민달팽이유니온과 스토리펀딩을 마치고 한 번 더 힘을 합한 ‘주거의제거점공간 온라인 액션’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17년 가장 ‘핫’한 다큐멘터리 작품인 ‘버블패밀리’를 관람한 뒤 부모 세대에게는 투기의 대상인 반면, 우리 세대에는 생존의 대상인 집에 대해 논하기도 했고(애증의 서울, 애증의 ‘부동산'), 나만의 공간에 대한 사연을 담은 [내 공간에서 나는] 인터뷰 프로젝트(내 공간에서 나는 가족을 선택했고, 나를 나타낼 수 있다, 휴식, 생활, 작업이 가능한 3툴 공간을 꿈꾼다)를 일러스트와 함께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 자취 시작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지만 정작 자신의 집은 좁아 다른 곳에서 자취 축하 파티를 연다는 아이러니함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집이 아닌 집들이 파티’에서는 우리 또래가 주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늘 안전에 대해 불안함을 품고 사는 여성 1인가구의 주거권에 대한 기사 ‘'남자 신발 두기'는 여성 자취 꿀팁이 될 수 없다’도 있었군요. 12월에 열린 오프라인 살롱 ‘잠깐 스쳐 지나가는 집은 없다’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원룸상식사전 구매자, 독자와 함께 스토리펀딩 후기와 주거에 대해 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5개월에 걸쳐 주거에 대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나니,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아진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모여서 머리를 맞댄 상상력의 결과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창한 활동이 필요할 거라고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요. 내 방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나는 현재 내 주거에 만족하고 있을까, 집을 소유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내가 이 집에서 사는 동안은 나답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거권에 대한 법률적 지식도 찾아보고, 민달팽이유니온과 같이 주거 의제에 대해 활동하는 시민 단체에도 연락해보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게 되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활동하게 되고. 이것이 주거 상상력이 길러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주거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SH중앙주거복지센터에 설립될 예정입니다. SH서울주택도시공사는 당산역 근처의 유휴공간을 활용해 이 공간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주거 문제에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과 활발히 대화하고 교류하며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유공간입니다. 지하 1층과 1층에 SH중앙주거복지센터와 코워킹 스페이스, 카페 등을 조성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SH서울주택도시공사는 지난달 이 공간의 이름을 짓는 공모전을 열었는데, 심사를 통해 ‘서울하우징랩’이라는 이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서울하우징랩이 도시 안의 남는 공간이 주거 의제 단체들의 거점 공간으로 탈바꿈해 앞으로 바람직한 주거 문화와 올바른 주거 정책을 이끌어가는 장소가 되길 기대합니다.


서울시NPO지원센터의 ‘서남권 주거의제 거점공간 조성사업’으로 민달팽이 유니온의 취재 지원을 받은 기사입니다.

Cover=Grace Heejung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