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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우회자들 (1)

태극기를 되찾아오자고 말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정인선 2017년 03월 03일

지난 2월 25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선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태극기 집회가 한창이었다. "이거 집에 가져가서 차에 달아 놓으면 펄럭펄럭 예뻐." 군복, 해병대 모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등과 가슴에 태극기를 단 노인이 초등학교 3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에게 태극기를 건넸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아이에게 노인은 태극기를 하나 더 건넸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다가 아이 손에 들린 태극기를 발견한 아버지는 당황스러워하며 아이를 무대 뒤로 데리고 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더니 아이 손에서 태극기를 빼내 무대 뒤편에 살짝 내려놓고 집회 현장을 황급히 벗어났다.

"태극기의 상징성을 되찾아오자"

보수 성향 시민들의 탄핵 반대 집회가 '태극기 집회'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탄핵에 찬성하는 쪽에선 태극기의 상징성을 되찾아오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삼일절이 다가오면서는 기념행사를 준비하던 지자체들이 탄핵 반대에 동참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몇몇 지자체는 태극기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기로 했다. 태극기의 의미가 퇴색할 대로 퇴색했으니, 아예 태극기라는 상징 자체를 사용하지 말자는 고육책이다. 아이 손에 들린 태극기를 내려놓고 태극기 집회 현장을 떠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해결책이다. 그런가 하면 보다 적극적인 해결책이 나오기도 했다. 탄핵 반대 세력과 구별하기 위해 태극기에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 촛불집회에 참여하자는 아이디어가 대표적이다.

다소 충격적인 해법도 나왔다. 삼일절을 하루 앞둔 지난 2월 28일,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은 '국기법 개정안'을 이달 초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국기를 특정 이익 실현을 위한 시위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게 제한하고, 필요한 경우 처벌을 하는 규정을 마련하겠다는 거였다. 1일 저녁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권 의원은 "특정 이익을 주장하는 집회에서 태극기를 사용하면, 이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 심지어는 혐오감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태극기의 상징성을 훼손하는 일이다"라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태극기의 의미가 더 퇴색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이라는 강력한 수단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지 않나"라는 정관용 앵커의 질문에도 권 의원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계엄령

태극기의 상징성을 되찾아오자고 말하기 전에 들여다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성조기다. 시청 광장에 가 본 사람이라면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태극기뿐 아니라 성조기를 함께 흔들고 있는모습을 봤을 것이다. 대한문 건너편 시청광장 끄트머리, 대로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같은 크기로 걸려 있다. 대체 탄핵과 성조기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태극기 뿐 아니라 성조기를 들고나온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계엄령. 몇 차례 이어진 태극기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계엄령이 답이다"라고 주장했다. 단순히 탄핵 기각 주장을 넘어, 탄핵 기각을 끌어낸 다음 해야 할 행동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계엄령과 성조기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계엄령은 박정희, 전두환 등 군부 독재 시절 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우회하기 위해 들고 나온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계엄령을 말하는 건,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절차를 거쳐서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킬 수 없으니 그 절차를 건너뛸 수 있는 우회로를 택하자는 이야기다. 이들이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과 문재인 전 대표를 '빨갱이'로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공은 유신 정권이 계엄령을 발동해 시민들의 기본권을 제약한 가장 큰 명분이었다. 반공이라는 국시를 위해서는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빨갱이'들이 사회 질서를 망가뜨리는 걸 막아야 한다는 게 유신의 서사였다. 전두환 정권이 5.18을 진압하며 민주화 운동 세력을 "북괴의 조종을 받은 빨갱이들"로 규정한 것도 마찬가지 서사에 근거한다.

지난 5일 시청광장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오영(73) 씨는 한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있었다. 탄핵 반대와 성조기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묻자 오 씨는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다. 우방이 좌익으로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image "우방이 좌익으로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줄 것이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에게 미국은 한국이 북한, 즉 나라의 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빨갱이 집단과 싸울 때 힘을 보태 준 고마운 존재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엄령을 발동해 민주주의적 절차를 우회함과 동시에 미국의 힘을 빌려 우리 안의 빨갱이를 몰아내는 데 총력을 다해야 한다는 강력한 서사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이들에게 자신이 흔들고 있는 게 태극기인지 성조기인지 더는 중요하지 않다.

민주주의를 우회하자는 달콤한 유혹

반면 친박 세력으로부터 태극기를 되찾아오자는 주장에는 '국기는 나라를 대표하는 숭고한 것'이라는 추상적인 논리 외에 떠오르는 서사가 없다. 3·1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기엔 일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서사가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울림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저들의 반공 서사에 비하면 말이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가 당신의 자녀 혹은 조카에게 불쑥 쥐여 준 태극기를 보고 당황해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image 당신의 자녀 혹은 조카였다면?

탄핵 반대 집회에 태극기를 동원한 게 "내가 이만큼 애국자다!"라는 과시의 목적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를 갖춘 것이라면 우리의 대응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 '되찾아오자!' 또는 '금지'가 아니라, 태극기에 새로운 서사를 입히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바로 민주주의이고 정치다. 비록 그 과정에서 매우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독일이 하켄크로이츠를 법으로 금지하기까지는 지난한 토론의 과정이 있었다. 그 덕에 하켄크로이츠 금지를 두고 누구도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계엄령으로 민주주의를 우회하자는 말도 안 되는 주장에 '태극기 집회 금지법'이라는 초정치적 수단을 통해 민주주의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맞서서는 곤란하다. 서사를 만들려는 노력을 생략하고 택하는 간편한 우회로는 당장은 달콤한 선택지이더라도, 언제 어디서 같은 방식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태극기 집회 금지법'을 입안하겠다고 나선 권은희 의원이 2014년 7월 재보궐선거에서 '광주의 딸'이라는 슬로건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다는 사실은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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