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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지방정치리포트①]시민 다섯 명만 모여도 시장을 만든다?

시민들의 일상 깊이 뿌리내린 자율적 결사체의 힘

정인선 2018년 03월 02일

지난해 11월 한 지방자치단체의 모의 공론조사 실험을 취재했다.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이 주제였다.

시민들은 대체로 내각제를 낯설어했다. “내각제는 의사 결정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위기 대응에 취약하다.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에는 적합하지 않다”거나 “내각제에서 한 당이 다수당을 구성하지 못하면 연정을 하거나 그도 안 되면 재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낭비다”와 같은 이유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시민은 독일을 예로 들었다. 당시 독일은 9월에 연방의회 선거를 치르고도 정당들 간 연정 협상을 이루지 못해 3개월째 정부 구성을 못하고 있었다.

예비협상도 아니고 예비예비협상은 또 뭐야?

지난 1월 5일 독일로 향하는 두 번째 비행기에 탔다. 이때까지도 독일 정당들은 연정 협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민당은 선거 전부터 정부 구성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자민당과 기민당은 난민 문제를 두고 다투느라 ‘자메이카 연정’1도 결렬 위기에 놓여 있는 상황이었다.

1월 13일 저녁 올리버 램케(Oliver W. Lembcke) 독일 예나대 정치학과 교수는 “연방의회 선거가 끝나고 독일 정당들 간 연정 협상을 이루는 데는 평균 한달 반이 걸린다. 연정 협상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image 올리버 램케 독일 예나대 정치학과 교수가 201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연정협상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서지원

자민당이 연정 불참을 선언한 뒤, 기민당과 사민당은 우리 일행이 독일을 떠나오기 전날인 13일에야 비로소 대연정 예비 협상에 합의했다. 올리버 램케 교수는 예비 협상에 합의했다는 건 ‘그래, 아직 연정에 참여할지 여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어디 한번 연정 여부부터 놓고 토론에 들어가 볼까?’하는 데에 겨우 합의를 봤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현지인들은 그래서 이전까지의 과정을 ‘예비예비협상’이라고 불렀다.

선거가 끝난지 네 달이 다 돼가도록 연정 협상이 마무리되긴 커녕 연정을 할지 여부에도 합의가 안 됐다니. 독일 시민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비효율적이라거나 정치인들이 무능하다거나 하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램케 교수는 연정 협상이 이제야 시작된 것은 ‘위기’이긴 하지만 정부가 당장 급히 해결해야할 국내 문제는 없어서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image 1월 6일 오후 베를린 미테 지구에 위치한 기민당 중앙당사 앞에서 현지 기자들이 기민당과 기사련의 연정 참여 여부에 대한 협상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정인선

image 베를린 미테 지구에 위치한 기민당 중앙당사. 사진=서지원

"협상이 독일 정치의 핵심이 아닐까?"

일정 첫 날인 1월 8일 만난 카스틴 샤츠(Carsten Schatz) 좌파당(Die Linke) 소속 베를린주 의원은 “독일의 정치 시스템상 연정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또 “예전엔 두 당의 연정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이젠 3~4개 정당의 협력이 있어야 정부 구성이 가능하다. 앞으로도 정당 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기성 정당이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이 늘어나면서 해적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 등 소수정당의 영향력이 커진 현실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독일에선 연방의회 차원뿐 아니라 주의회 차원에서도 정당들 간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나눠 갖고, 이들이 다수 연합을 이뤄 정부를 구성한다. 카스틴 샤츠 의원은 2016년 9월에 있었던 베를린주의회 선거를 예로 들었다.

“당시 선거는 9월에 이뤄졌지만 연정협상은 12월에야 마무리됐다. 약 3주간 베를린에 거주하는 당원들에게 주의회 연정 협상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3개월이 걸렸어도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스-크리스티안 하우스만(Hans-Christian Hausmann) 기민당(CDU) 소속 베를린주 의원은 “협상이라는 것이 독일 정치의 핵심이 아닐까?”라며 역사적 맥락을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들은 독일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체크 앤 밸런스(check and balance, 견제와 균형)를 위한 제도를 만들었다. 연정을 해야만 정부 구성이 가능하도록 만든 정치제도도 그 중 하나다. 연방과 주, 그리고 그 아래 단위 지방정부도 다 그렇다.”

image 카스틴 샤츠 베를린주 의원(좌파당)과 하우스만 샤츠 의원(기민당). 카스틴 샤츠 좌파당 소속 베를린주 의원은 투블럭 헤어스타일에 피어싱, 빨간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사진=서지원

16세부터 97세까지, 모여서 술이나 마셔도 괜찮아

정부 구성에 참여한 경력이 가장 긴 자민당(FDP, 자유민주당)은 독일 전역에 5만 4천여 명의 당원이 있다. 전국을 350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마다 대표를 뒀다. 350명의 지역 대표는 매년 한 번씩 주 차원의 당대회를 통해 만남을 가진다.

84명의 지역 대표단으로 구성된 ‘작은 당대회’도 두 달에 한 번 열린다. 주의회 의원, 연방의회 의원들이 작은 당대회에서 지역 대표단에게 보고를 하고, 지역 대표단의 요구사항을 직접 듣는다. 헬무트 메츠너(Helmut Metzner) 자민당 베를린지부 위원장은 "이 과정을 통해 지역에서 모인 당원들의 의견이 중앙으로 전달된다"고 설명했다.

image 1월 10일 오전 자민당 베를린지부 사무실에서 헬무트 메츠너 자민당 베를린지부 위원장이 자민당 지역 조직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서지원

image 헬무트 메츠너 자민당 베를린지부 위원장이 자민당의 2017년 연방의회 선거 전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빠른 디지털화를 주장하는 자민당은 연방의회 선거 당시 "디지털 퍼스트, 부작용은 나중에(Digital first, bedenken second)"라는 표어를 사용했다. 사진=서지원

기민당(CDU, 기독교민주당)은 독일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전국에 45만여명의 당원이 있다. (독일의 인구는 2016년 기준 약 8267만 명이다.) 기민당과 협력하는 바이에른 주 지역정당인 기사련(CSU, 기독교사회연합)을 합치면 당원 수가 55만 명에 이른다.

55만 명의 기민당 당원들은 15,000여개 당원협의회로 잘개 쪼개져 활동한다. 베를린 지역에는 12,300여명의 당원이 있다. 베를린의 12개 구 가운데 당원 수가 비교적 적은 리히텐베르크 구엔 280명, 당원 수가 많은 슈테힌리츠 첼린도르프 구엔 2300명의 당원이 있다. (리히텐베르크 구는 구동독 지역, 슈테힌리츠 첼린도르프 구는 구서독지역에 속한다.)

image 1월 11일 오후 기민당 베를린지부 사무실에서 더크 리츠 기민당 베를린지부 사무총장이 베를린의 구별 당원 수를 비교 설명하고 있다. 사진=서지원

기민당 베를린지부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베를린 지역의 기민당 당원들은 평균 16년동안 당적을 갖고 활동해 왔다. 가장 오래 전에 당원이 된 사람은 기민당이 처음 만들어지던 해인 1945년에 입당한 97세 할아버지였다. 정당들이 위기 상황마다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고, 당명을 수시로 바꾸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2

한 달에 약 두 번 열리는 지역 모임에서 당원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하기도 하지만, 모여서 근황을 공유하며 술을 마시며 놀기도 한다. 더크 리츠(Dirk Reitze) 기민당 베를린지부 사무총장은 1월 11일 간담회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나누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한 정치 활동의 한 부분이다”라고 강조했다.

정당이 기업만큼 자율성을 갖는다?

더크 리츠 기민당 베를린지부 사무총장은 “독일에선 정당이 거의 기업만큼 독립성을 갖고 활동할 수 있다. 듣기로 한국에선 정당이 유권자에게 만년필 하나도 돌릴 수 없다고 하던데, 독일에선 정당이 모두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별 정당에 큰 자율성이 보장되는 대신, 내부적으로 엄격한 규칙이 요구된다. 인사가 대표적이다. 더크 리츠 사무총장은 “나와 마찬가지로 기민당 당직자인 내 부인은 필리핀 출신이다. 필리핀에서는 당 지도부가 인사를 좌우하지만 독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선 공직선거 후보자, 당직자 등의 인사에서 개개인의 정치인(리더그룹)이 아니라 당의 하부 조직을 통한 결정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의원 중 단 한명도 윗선에서 내려보낸 이는 없다. 언제나 밑에서부터 뽑혀 올라온 사람만이 의원이 될 수 있다.”

image 기민당 베를린지부는 독일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카데베(KaDeWe)가 내려다보이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사진=서지원

image 기독교 정당인 기민당의 정체성에 맞게 기민당 베를린지부의 중앙 회의실 내부엔 십자가 장식이 걸려 있다. 사진=황종섭

다섯 명만 모여도 시장을 만드는 나라

독일 지방자치의 가장 아래 단위인 게마인데(gemeinde)는 한국으로 치면 읍/면/동에 해당한다. 이 작은 단위에서도 정해진 임기마다 의원을 선출하고, 선출된 의원들 가운데서 시장을 뽑는다. 게마인데 단위에서는 정당뿐 아니라 뜻 맞는 주민들이 모인 작은 사회단체 역시 선거에서 후보자를 내보낼 수 있다. 선거에 후보자를 내는 것은 정당의 핵심 기능이다. 기성 정당이 특정 이슈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시민들이 모인 작은 결사체들이 사실상 정당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전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비르켄베르더 게마인데(Gemeinde Birkenwerder)는 인구 약 8000명의 작은 마을이다. 비르켄베르더의 시장 스테판 짐니옥(Stephan Zimniok) 씨는 “나 역시 정당 소속이 아닌 사회단체 소속이다. 비르켄베르더에는 노인 모임, 샛강 살리기 모임, 청년 부모모임 등 다양한 단체들이 활동한다. 나는 청년 부모모임 소속으로 선거에 나와 당선됐다”고 소개했다.

image 1월 9일 스테판 짐니옥 비르켄베르더 게마인데 시장이 게마인데의 행정과 정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서지원

비르켄베르더 시민 가운데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시민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스테판 짐니옥 시장은 “따로 조사를 하지 않아 구체적인 숫자는 알 수 없지만, 회원 수가 60여 명인 단체도 있고, 5명밖에 안 되는 곳도 있다. 내가 속한 청년 부모모임의 경우 회원이 5명이다.”라고 답했다.

시민 다섯 명만 뜻을 모아도 지방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다니. 이렇게 작은 단위에서도 자율적 결사체와 협상이 힘을 발휘하는 곳이라면, 연방 차원의 대연정을 비롯한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시민들이 불만을 갖는 것이 오히려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기민당과 자민당, 그리고 녹색당의 상징생인 검정-노랑-초록이 자메이카 국기의 색 조합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연정’은 기민당과 사민당이 보수-진보 통합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2. 이런 독일의 정당들에게도 당원 수가 줄고 있다는 것은 큰 고민거리다. 더크 리츠 기민당 베를린지부 사무총장은 “30년 전만 해도 기민당의 당원은 100만명에 이렀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34년 전 내가 정당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땐 ‘여가 시간에 뭘 하지?’ 생각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옵션이 축구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당 활동에 시간을 쏟기가 쉬웠다. 하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은 스마트폰, 온라인 피트니스 등 다양한 곳에 시간을 쏟을 수 있다. 그만큼 당원을 얻기가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