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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수 있는 게 이 명함밖에 없다

1958년생 선거법이 후보 입 막고 손 묶는 방법

정치발전소 2018년 06월 11일

사단법인 정치발전소 '이상한 나라의 선거 기자단'에서 기고해주신 글 입니다_Deepr

나는 명함입니다.

요즘 길바닥에서 버려진 제 친구들을 많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원래 유권자들이 공직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에 대해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하지만 동시에 길거리 미관을 해치는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지요.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등 예쁜 빛깔로 곱게 칠해져서 세상에 나왔건만, 저희들이 여러분의 관심을 받는 순간은 몇 초에 불과해요. 그래도 이번 지방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들은 저 같은 작은 종잇조각을 나누어주는 일로 하루를 보내곤 한답니다. 어차피 대부분 슬쩍 보고 버릴 텐데, 왜 후보자들은 자꾸 명함을 나눠줄까요?

image 바닥에 떨어진 명함들. 사진=장재용

줄 수 있는 게 이 명함 밖에 없다. 가진 거라곤 이 명함들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해요. 후보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명함을 나누어주는 것뿐이기 때문이죠. 특히 5월 31일 본선거기간이 시작되기 전에는요.

우리나라의 현재 공직선거법에서 예비후보자들이 할 수 있는 선거운동방법은

  • 선거사무소에 간판‧현수막을 설치하기
  • 명함을 나눠주기
  • 예비후보자홍보물을 지역구 내 1/10 이내의 세대에 배부하기
  • 후보자가 어깨띠 또는 예비후보자임을 나타내는 표지물을 착용하기
  • 직접 통화해서 지지를 호소하기

로 정해져 있답니다(공직선거법 제60조의3).

선거운동 방법이 많아 보인다고요? 그저 목 좋은 길거리에 사무실을 잡아서 현수막을 걸어 놓고 사람들이 쳐다봐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한계가 있죠. 직접 통화하는 건요? 수만 명이 넘는 유권자의 전화번호를 모두 수집하기는 어렵고, 또 가능하다 하더라도 본인의 동의가 없이 수집하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 될 수 있어요. 예비후보자홍보물을 한 번 나누어줄 수 있지만, 기껏해야 전체 세대의 10%에게만 보낼 수 있죠. 결국 예비후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어깨띠를 차고 명함을 나누어주는 것밖엔 없답니다.

그런데 명함 주기도 참 쉽지가 않다.

줄 수 있는 건 명함밖에 없는데, 그것마저도 쉽지가 않아요.

우선 저를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어요. 예비후보자 본인, 후보자의 배우자와 직계존비속은 명함을 단독으로 나누어줄 수 있어요. 배우자가 없다면 (예비)후보자가 지정한 1인이 명함을 단독으로 나누어줄 수 있도록 최근에 법이 개정되었습니다. 다행이죠.

하지만 성인 자녀가 있거나 부모님이 살아 계신 후보자들이 더 많은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건 그대로예요.정의당 서울시 관악구의원 후보자 왕복근(30)씨는 이 규정이 청년 후보들에게 지나치게 불리하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선거운동을 도울 수 있는) 선거권자가 되려면 19년이 필요합니다. 저 같은 만 30세 후보에게 만 19세 아이가 있으려면 열 살 때 아이를 낳아야 해요. 말이 안 되는 거죠.
후보자의 부모가 도와줄 수 있고 성인 자녀가 세 명이면, 배우자까지 더해서 후보자와 따로 명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여섯 명입니다. 누군가는 여섯 곳에서 명함을 나누어줄 수 있고, 저 같은 사람은 한두 곳에서만 명함을 나누어줄 수 있죠. 예비후보자 기간에는 후보자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명함을 나누어 주는 것밖에 없는데,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의 숫자에서 차이가 나게 되는 거죠.”

청년 후보의 울분이 느껴지시나요?

그리고 선거사무원이나 다른 사람은 오직 후보자와 함께 있어야지만 명함을 나누어줄 수 있답니다. 그런데, ‘함께’의 기준이 애매모호합니다.

며칠 전 서울 관악구의원 후보자 이기중(37)씨는 선관위로부터 주의를 받았습니다. 유세차에 올라 마이크를 들고 연설을 하는 동안에 인도 위에 있는 선거사무원들이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image 시민들에게 명함을 나눠주고 있는 이기중 정의당 서울시 관악구의원 후보. 사진=장재용

이 후보가 선관위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 후보자가 차 위에 있고 선거사무원들이 인도 위에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 후보는 “(선거사무원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핀마이크를 써야 하나 고민 중이다.”라고 밝혔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후보자가 차 위에 있고 선거사무원이 인도에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니, 도대체 ‘함께’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선거관리위원회에 질의해 보았습니다. 선관위에 따르면, ‘「공직선거법」 제60조의3 및 제93조의 규정에 (예비)후보자와 함께 다니는 사람에 대한 거리 제한 규정은 없으나, … 예비후보자의 활동에 부수되어 단순히 그 명함을 교부하는 범위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명함을 배부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정도에 이르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라고 하네요. 여전히 애매모호하죠?

image 여러 종류의 정책명함을 제작해 유권자에게 동시에 배부해도 되는지 질의하고 받은 답변. 이미지=장재용

참, 보통 후보자들은 명함을 한 종류만 만들지는 않아요. 법적으로 명함의 크기는 길이 9cm, 너비 5cm로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한 명함에 자신의 경력, 연락처, 공약을 모두 집어넣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경력사항만 적힌 명함과 정책명함을 따로 만들기도 하고, 청년‧여성‧학부모 등 유형별로 맞춤형 정책명함을 만들기도 하죠.

하지만 여러 종류의 명함을 제작했다고 해도, 여러 종류의 명함을 동시에 유권자에게 드릴 수는 없어요. 선거관리위원회에 질의해 보니, 명함의 동시 배부는 공직선거법 제60조의3 및 제93조에 위반된다고 합니다. 청년이면서 여성인 분, 여성이면서 학부모이신 분이 있다고 해도 명함 두 개를 드릴 수는 없는 거죠.

명함을 나눠줄 수 있는 장소에도 제한이 있어요. 예비후보자 신분으로는 선박, 정기여객자동차, 열차, 전동차, 항공기의 안, 터미널‧역·공항의 개찰구 안, 병원·종교시설·극장의 안에서는 명함을 나누어줄 수 없어요. 장소 제한을 하는 취지에 대해서는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러한 장소 제한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식 후보자가 된 다음에는 명함을 나누어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제한은 사라집니다. 그 이전에는 안 되다가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 되면 극장이나 교회에서 명함을 나누어주어도 괜찮은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요? 5월 31일 0시 1분에 무슨 마법이라도 일어나는 걸까요?

image 관악구의원 후보들의 명함. 사진=장재용

선거관리위원회에 질의해 보니, ‘명함의 배부주체, 규격, 배부장소와 방법에 제한을 두는 것은 명함배부가 무분별한 선전·인쇄물의 배부로 이어져 선거가 과열·혼탁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라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선거가 과열되고 혼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유권자와 후보자의 소통을 어렵게 하는 온갖 장벽을 쌓는다면,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아닐까요? 선거 시즌이라면 더더욱 유권자와 정치인의 소통이 더 활발해야 할 텐데, 우리나라 선거법은 오히려 선거 기간에 소통을 어렵게 하고 있어요.

단순히 명함의 문제가 아니다.

아, 그리고 그거 아세요? 선거를 돕겠다고 자원봉사자가 찾아와도,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답니다. 왕복근 후보는 “예비후보자 시절 대학생 당원들이 선거를 돕겠다고 연락이 왔는데도, 선거법 때문에 두 명 이상 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경험담을 얘기했습니다.

이기중 후보 역시 “자원봉사자가 와도 어깨띠를 멜 수가 없다. 후보를 나타내는 어떤 것도 착용할 수 없고 그저 혼자 길거리에서 ‘이기중을 찍어주세요’ 얘기만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명함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은 (후보자의 배우자, 부모자식을 제외하면) 선거사무원과 후보자가 지정한 1인 뿐입니다. 물론 선거사무원으로 등록하면 되지만, 법적으로 둘 수 있는 선거사무원 수에는 제한이 있답니다. 또 하루 이틀 도와주실 분들을 일일이 선거사무원으로 등록했다가 또 며칠 뒤에 교체하는 것도 꽤나 번거로운 일이지요. 지역 선관위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서면으로 신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후보를 돕겠다는 자원봉사자가 많더라도, 선거법 때문에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거죠.

5월 31일부터 본선거가 시작되었어요. 우리나라 공직선거법에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제58조 제2항)”고 적혀 있답니다. 이제 제 주인님은 하루 종일 명함만 나누어주는 신세에서 벗어나게 된 걸까요? 하지만 그 조항에는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금지 또는 제한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단서가 붙어 있어요. 바로 이 규정이 또 한 번 후보자들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답니다.

if y'all fuck this up i'm moving to canada

hari nef(@harinef)님의 공유 게시물님,

△미국 모델 하리네프는 2016년 미 대선기간, 트럼프를 비난하는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미국에서는 선거철이 되면 유권자들이 자신의 차 유리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집 마당에 팻말을 설치하는 등으로 후보자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히곤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유권자들도 ‘나는 OOO을 지지합니다’라는 스티커를 차에 붙일 수 있을까요? 저희 후보님의 지지자들이 차에 지지 스티커를 붙이고 도로를 달린다면, 후보님이 명함만 하루 종일 돌릴 필요는 줄어들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선거법 제93조를 보면, ‘누구든지 선거일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것을 배부·첩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선거법을 보면요, 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아서 왜 후보님이 명함을 돌릴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가게 되지요. 가진 것은 튼튼한 다리뿐인 우리 후보님,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지지를 호소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쉽게도 호별방문을 통한 지지호소는 금지되어 있어요(제 106조). 이런 정책 꼭 필요하지 않으냐고, 유권자들에게 서명을 받고 싶은데 서명운동도 금지되어 있어요(제 107조). 심지어 선거운동원들이 걸어 다니면서 구호 외치는 것도 조심해야 해요. 5명 초과(후보자와 함께 한다면 후보자 포함 10명 초과) 거리를 행진하거나, 연달아 소리 지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요(제 105조).

image 비슷하게 생긴 명함들. 사진=장재용

단순히 명함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항상 선거 시즌이 되면 후보자들은 자신의 공약을 유권자에게 알리고 싶어 하고,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의 공약을 알고 싶어 해요. 그렇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닿기는 너무나도 어려워요. 두 달 동안의 예비후보자 기간에는 사실상 명함으로만 소통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명함 속에는 많은 내용을 넣을 수 없어요. 왕복근 후보는 “예비후보자 신분으로는 ‘저 친구 열심히 한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식 선거운동 기간이 되어도 동마다 2개씩 걸 수 있는 현수막, 한 번 우편으로 배달되는 선거공보물 정도가 추가될 뿐이지요.

이게 널 웃게 만들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래도 건네준다 니가 받아주길 바래본다

현재의 선거법은 정치 신인에게는 불리한 점이 많아요. 예를 들면, 현역 지방의원은 의정보고서를 모든 선거구민에게 발송할 수 있고, 배포하는 방식에도 큰 제한이 없습니다(제111조). 예비후보자들이 예비후보자홍보물을 선거구 전체 세대의 1/10에게만, 오직 우편으로만 발송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유리한 셈이죠(제60조의3). 왕복근 후보는 “예비후보자들은 주민들과 얘기하고 명함 나누어주는 것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명함에 들어갈 수 있는 내용은 굉장히 제한적이죠. 반면에 현역 의원들은 의정보고서를 최대한 나누어주고 나서 후보등록을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의 서복경 교수에 따르면 현행 공직선거법 체제의 기원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요(<제한적 경쟁의 제도화: 1958년 선거법 체제>, 2013, 서복경). 당시 선거운동의 기간 제한, 인적 제한, 방식의 제한, 기탁금 제도 등 각종 선거운동의 장벽이 만들어졌지요. 당시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자유당과 민주당은, 1956년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조봉암의 진보당이 제3세력으로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후보자와 유권자의 접촉을 어렵게 하고, 정치 신인과 새로운 정당이 제도권 정치에 진출하는 문턱을 크게 높인 것이죠.

현재의 선거법 하에서 돈도 없고 정당도 변변찮은 정치신인이 할 수 있는 선거운동은 사실상 명함을 나누어주는 것밖엔 없어요. 법이 그렇다는 걸 어쩌겠어요. 입을 막고 손을 묶은 선거법 속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은 결국 ‘그렇고 그런 놈’들이 만들어 낸 진흙탕 같은 정치 속에서 진주 같은 후보를 찾고 싶은 유권자들이 아닐까요? 그래도 저는 믿어요. 이 작은 명함 속에 담긴 후보자의 진심이 유권자들에게 전달되리라고. 몇 초 동안 제게 주는 눈길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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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장재용 정치외교학과 연합동아리 '여정' 회원
편집=정인선 Deepr 기자, 황종섭 정치발전소 기획실장, 조성은 정치발전소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