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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덕질 철학, 갖고 싶으면 만들면 된다

윤지원 2017년 03월 08일

아이돌 산업이 발전하면서 그에 발맞춰 팬문화도 변하고 있다. H.O.T., 젝스키스, 신화 등의 아이돌 1세대 때만 해도 기획사는 소위 '슈퍼 갑'이었다. 가수가 딴따라이던 시절인지라 아이돌에 대한 대우는 상상 초월로 열악했고, 그런 가수를 좋아하는 팬들 역시 한심한 취급을 받았다. 2세대의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등을 거치면서 아이돌 시장은 점차 산업으로써 틀이 잡혀 갔다. 이에 따라 기획사와 팬 역시 판매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띠기 시작했다. 3세대 아이돌의 특징을 가장 대놓고 보여준 것이 작년 Mnet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에서 탄생한 걸그룹 아이오아이(I.O.I)다. 팬이 아이돌 멤버를 투표로 정한다는 포맷은 한국에서 부분적으로만 실험되어 왔다. 하지만 Mnet은 아예 기획 단계에서부터 팬들에게 인기 투표로 데뷔 전 아이돌 멤버를 조합해볼 수 있는 권한을 전면적으로 부여했다. 팬들은 더 이상 소속사가 내놓는 그대로 소비하지 않는다. 소극적으로 욕망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상품을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하는 소비자의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아이돌 팬덤의 커스터마이징은 때론 덕질하는 대상 자체를 향하기도 한다. 아이돌 빅스(VIXX)의 멤버 라비는 솔로앨범 뮤직비디오에서 성 상품화 장면을 넣어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라비의 주요 소비층인 여성 팬들은 집단적으로 음원을 보이콧하고, 회사에 항의 메일을 보내는 등 민감하게 반응했다. 팬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가수에게 음원 보이콧이라는 최고 수준의 리액션을 취한 것은, 그들 역시 자신들의 지갑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항의에 가수와 소속사는 단 하루 사이에 문제 장면을 삭제하고 사과하는 등 유례 없이 빠른 피드백으로 대응했다. 이 사례는 아이돌과 회사가 팬덤을 인식하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아이돌 팬덤의 위상 변화는 아이돌 굿즈(goods) 소비 양상에도 드러난다(굿즈의 뜻은 일반 상품이지만, 여기서는 아이돌과 관련된 파생 상품을 의미한다). 아이돌 굿즈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굿즈 시장이 다양성을 띠게 된 것은 3세대 들어와서다. 그 전에는 기껏해야 아이돌의 얼굴이나 로고가 커다랗게 그려진 응원 수건, 포토 카드, 달력, 명찰 등이 다였다. 이런 굿즈는 실생활에서 착용하고 다니기 힘들기도 했을 뿐더러 특히 어린 팬들에게는 가격도 사악했다. 아이돌의 무대를 응원하러 갈 때 말고는 쓸 데도 별로 없었다. '내 새끼(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돌을 팬들은 그렇게 부른다) 가지고 장사하지 말라'고 팬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원래 덕후의 마음은 상술인 것을 알아도 지갑을 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굿즈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3세대 아이돌 팬들의 소비 시장은 이전과는 다른 성격을 띤다. 팬들의 소비는 더욱 커지고, 다양해지고, 디테일해졌다. 이들은 소속사에서 굿즈를 내 주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제조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SNS 상에서 팬들이 직접 제작하는 아이돌 인형이다.

image 위 더블유 코리아와 SM엔터테인먼트가 협업해 만든 엑소(EXO) 폰케이스. 출처 W website / 아래 한 팬이 올린 엑소의 멤버 백현 인형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huniq_56

아이돌 인형은 아이돌을 캐릭터화 해서 인형으로 만든 것으로, 단순한 눈코입과 짧고 통통한 팔다리만으로 어떤 아이돌인지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당사자의 키 포인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기획하고 다듬어서 내보낸 것은 회사지만, 아이돌의 ‘덕질 포인트’를 더 잘 아는 것은 팬들이다. 그들은 대형 망원렌즈를 사용해서 찍은 수천 장의 사진과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영상, 수십 번도 더 돌려 본 움짤을 통해 아이돌 파악을 완료했다. 내 새끼에게는 더욱 더 잘생기고 예뻐 보이고 단체로 팬들을 숨지게 할 수 있는 포인트가 많은데 소속사가 그것을 포착하지 못하니 팬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따름이다. 이 수준까지 다다른 팬에게 소속사의 일부 굿즈는 그야말로 공식성과 의리 때문에 사는 것이지, 가지고 싶어 안달난 상품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홀로 만들기에는 제작 공장의 단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모은다. 도안을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 최소 열 명, 많게는 백 명 단위도 훌쩍 넘겨 모이면 제작이 진행된다. 이 과정은 매우 치열하다. 마치 콘서트 티켓팅을 방불케 하는 선착순 경쟁이 펼쳐진다. 많은 팬들이 사용하는 SNS인 트위터에 ‘아이돌 인형’을 검색하면 관련 계정만 20개가 넘는다. ‘인형 공구(공동구매)’ 계정은 50개가 넘는다. 특히 유명한 인형의 경우 '머글(어느 누구의 팬도 아닌 사람)'이 가수는 몰라도 인형은 아는, 상황의 역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image 트위터에서 '아이돌인형'을 검색한 후 나오는 첫 화면

공구를 진행하는 사람인 ‘총대’는 개인적인 수익을 챙기지 않는다. 상업적 이용으로 인한 저작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팬이 직접 제작한 아이돌 굿즈는 인형 외에도 컵 코스터, 키링, 스티커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일단 얼굴이나 로고가 커다랗게 박혀 있지 않아 사용자가 실생활에서 민망할 일이 없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팬임을 은근히 자랑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반면 인형은 성격이 약간 달라서, 예쁘고 귀여워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팬이자 까다롭고 적극적인 소비자로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 그들은 '갖고 싶으면 만들면 된다'는 독특한 소비 문화를 앞장서 만들어내고 있다.

팬질은 변화하고 있다. 아이돌 1세대 때는 연상의 남자친구·여자친구 이미지를 팔았다면, 2세대 때 ‘누나팬, 삼촌팬’이 유입되었고, 3세대에서는 아이돌을 욕망하는 연령층이 10대에서 30대까지 상당히 넓게 확장됐다. 회사가 팬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방향에 머물러있던 팬질의 범위는 보다 두터워진 연령층과 구매력을 바탕으로 폭넓게 확장됐다. 동시에 맹목성에서 탈피해 시장성을 띠면서 팬들에게는 거부를 포함한 선택지가 생겼다. 회사가 던져 주는 떡밥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팬질의 범위를 자발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모습이 처음 관찰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돌이 소재인 팬픽 역시 2차 창작물이라는 관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하지만 굿즈 공구는 인터넷 상에서의 팬질이 모니터 바깥으로 나와 실물 상품으로 팬들의 손에 쥐어 진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기획사 역시 팬이 예전과 다르게 지갑을 열지 않고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소비자임을 인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