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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의 비민주성

유권자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정인선 2017년 03월 23일

누가 이길지 뻔히 보이는 게임은 재미가 없다. 누군가는 민주주의를 '불확실성의 제도화'라고 정의하기도 했지만, 탄핵 정국 직후 치러지는 대선에서 유권자가 불확실성이 주는 재미를 기대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유권자들이 이변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후보들, 그러니까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이변 없음'을 당연히 여기고 게임에 불성실한 태도로 임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적폐청산으로 촛불혁명 완성?

현재 대선 주자들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은 탄핵 정국이 열린 뒤 줄곧 '적폐청산'을 말했다. 박근혜와 친박, 그리고 그들을 보위해 온 자유한국당은 적폐이고,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한번에 없애는 일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크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4일 대선공약의 기본구도로 제시한 '4대 비전 12대 약속' 가운데 '촛불혁명의 완성'과 '적폐청산'은 각각 4대 비전과 12대 약속의 맨 앞머리를 차지한다. 정의당도 지난 1월 '박근혜 정권 적폐청산특위'를 출범했고, 국민의당도 지난해 12월 31일 정유년에는 적폐청산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야권의 적폐청산론은 탄핵 정국이 지나간 뒤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다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87년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뒤 소위 '진보개혁세력'이 보수를 '반민주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들과의 모든 타협을 악으로 치부한 '민주 대 반민주 프레임'이 오버랩된다. 실제로 탄핵 정국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후 "이명박, 박근혜의 선의도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문재인 전 대표와 그 핵심 지지층의 십자포화를 받아야 했다.

유권자가 듣고싶은 말은 따로 있다

안타깝게도 유권자들은 대선 주자들로부터 적폐청산 약속이 아닌 다른 메시지를 듣고 싶어하는 듯하다. 한겨레신문이 20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57.8%) 유권자가 차기 대선에서 '진보개혁 성향의 정부'가 집권하길 바란다. 여기까진 민주당의 기대와 일치한다. 하지만 향후 정치권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는 민주당이 열심히 밀고 있는 '적폐청산'을 꼽은 응답자(41.3%)보다 사회통합을 이야기한 응답자(49.3%)가 훨씬 많다. 한겨레는 이를 최근 문 전 대표 지지율이 하락세를 걸은 반면, 안 지사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탄 배경으로 분석했다.

Deepr가 '국가지표체계'와 '주민등록인구현황' 자료를 바탕으로 산출한 통계를 봐도,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정권 교체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대, 30대, 40대, 50대 유권자가 지방선거, 국회의원선거, 대통령선거에 각각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비교한 아래 그래프를 보자.

image 90·80·70·60년대 생의 투표 참여도 비교 ⓒ Deepr 권순민

87년 이후 출생자들은 대통령선거보다 국회의원 선거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면 82년 이전 출생자들은 총선에 비해 대통령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국회의원선거와 대통령선거 투표율의 격차는 특히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더 크게 벌어진다. 중장년층 유권자일수록 의회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상적 정치 과정에 기대를 걸기보다, 정권교체 '한방'을 이루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반면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도 내 삶의 현실적 고통이 줄어들지 않으리라는 게 젊은층의 인식이다. 하지만 야권은 여전히 민주화운동 시절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 "적폐청산을 통해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바를 달성하겠다"라는 메시지는 그 결과물이다.

적폐청산, 가능하긴 한걸까?

적폐청산론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실현가능성이 떨어진다. 민주당이 청산을 주장하는 적폐들은 민주당이 다시 정권을 잡더라도 혼자 힘으론 해결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정치는 타협과 조정을 전제로 한다. 얼마 전 닷페이스의 동영상을 통해 유명해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정진웅 박사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탄핵에 반대하는 15~20%의 동료 시민들도 함께 안고 가야 하는 제도"다.

정권교체를 이뤄야만 적폐를 청산할 수 있으므로 표를 한 곳에 모아 달라는 호소는 결국 집권을 못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더불어민주당은 19대 국회 당시 중요한 순간마다 "과반 의석을 못 갖고 있기 때문에 새누리당의 독주를 막을 힘도 없다"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유권자의 실망을 샀다.

적폐청산론과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적폐청산론은 정치를 0 아니면 100의 게임으로 만든다. 지난 21일 더불어민주당 경선 6차 토론회에서 빚어진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날 토론회는 MBC의 주최로 이뤄졌는데, 한 후보가 다른 후보를 지목해 4분간 '맞짱 토론'을 벌이는 게 주된 포맷이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지목한 뒤, 안 지사에게 '맞짱'을 거는 대신, "공영방송의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3분간 펼쳤다. 문 전 대표의 발언이 끝난 뒤 안 지사에게 남은 시간은 1분 남짓이었다. 안 지사는 문 전 대표가 토론의 형식을 무시한 것에 대해 항의한 뒤, "공영방송 개혁을 위한 초당적 해법을 찾겠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답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누가, 어떻게 공영방송 구조개혁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 구체적 방법을 놓고 겨루기보다, 공영방송 구조개혁에 대한 진정성을 겨루는 걸로 공영방송 개혁에 대한 토론은 끝났다. 이것만 듣고 두 후보 중 누가 공영방송 구조개혁을 이뤄 낼 적임자인지 가릴 수 있는 유권자는 없다. 적폐청산론은 이처럼 생산적 논의와는 거리가 멀다.

적폐청산론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우리는 지난 몇년간 '발본색원', '손톱 밑 가시', '국가 대개조'와 같이 야당에게 타협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화법에 맞서야 했다. 적폐청산론은 이걸 방향만 바꿔 다시 반복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집권을 하지 않더라도 제한된 조건 안에서 유권자의 삶을 개선할 방법을 최대한 찾겠다는 약속이 훨씬 책임있게 들린다. 어떤 메시지가 더 많은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이끌어낼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이다. 정치는 불확실성의 게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