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유승민과 비박계를 움직인 보수 유권자의 힘

책 <양손잡이 민주주의>로 본 탄핵 정국의 또다른 주역

정인선 2017년 03월 29일

"동물은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을 즐겨 봤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 20년 동안 MBC 기자로 일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저서 <누가 지도자인가: 박영선의 시선, 14인의 대통령 꿈과 그 현실>에서 1994년 당시 은둔 중이던 박근혜와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나는 '육영수 여사 서거 20주기'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 모처 식당에서 그(박근혜)와 점심을 하며 하루 일과를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박근혜 대통령은 "TV 프로그램 중 <동물의 왕국>을 즐겨본다"고 답변했다. "왜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세요?" 라고 재차 질문하니, "동물은 배신하지 않으니까요."라고 답했다.

박 의원은 책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에 유독 민감하게 구는 이유를, 어려서부터 아버지 박정희가 측근들에게 배신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쌓인 분노 때문이라고 말한다.

image 사진 = 박근혜 전 대통령 페이스북

배신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박근혜의 캐릭터는 지난 몇 년간 여당이 분열 위기에도 똘똘 뭉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박근혜와 청와대, 그리고 정부가 아무리 상식 밖의 일을 해도, 새누리당 의원들은 쉽게 반기를 들 수 없었다. 한 번 '찍히면' 자신의 정치 인생도 그 순간 끝이라는 걸 몸으로 체득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새누리당 안에서 비박계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의원이 원래도 드물었지만, 한때 박근혜의 최측근이었던 유승민이 한순간 나가떨어지는 걸 본 의원들이 충격 효과를 보면서 '배신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건 새누리당 의원들 사이에 암묵적인 룰이 됐다.

탄핵 정국, '배신의 정치'를 이끌어내다

그 룰이 깨진 건 탄핵 정국에서였다.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가결은 새누리당 내 비박계, 그리고 친박 의원 일부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최장집 정치발전소 이사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최근 출간한 <양손잡이 민주주의>(후마니타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국회에서 탄핵을 이끌어 낸 힘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광장에서 분출된 시민 집회의 힘이다. 다른 하나는 국회 내에서 절반에 이르는 보수적 정부 여당이 야당 주도의 탄핵 추천에 동참한 것이다."
-최장집, <양손잡이 민주주의> 104쪽

당시 야3당(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만으로는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정족수인 200명에 한참 모자랐다.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질 게 확실한 야3당 의원에 탄핵에 찬성하며 새누리당을 탈당한 의원을 더해도 172명으로, 28명이 더 필요했다. 거기에 비박 의원을 합해도 200명이 될까 말까였다. 그래서 새누리당에서 '친박'으로 분류되는 의원 가운데 몇 명이나 박근혜 대통령을 배신할지가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다. 언론은 매일같이 새누리당 의원들을 상대로 탄핵안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여론조사를 했고, 이에 기반을 둔 추측을 제각기 내놨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투표에 불참한 최경환 의원을 제외한 299명의 국회의원 중, 찬성 234명, 반대 56명, 기권 2명, 무효 7명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언론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수의 새누리당 의원이 배신을 택하고 탄핵에 동참한 덕분에 탄핵소추안은 국회를 통과해 헌법재판소로 향했다.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걸 두려워하던 새누리당 의원들이 어떻게 탄핵 정국에서는 배신을 택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유권자의 눈이 무서워서였다.

새누리당 의원들, 계산기를 다시 두드리다

점잖게 말하면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이겠지만, 솔직하게 표현하면 "이대로는 다음 선거에서 의석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두려움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찍히면 정치 인생도 끝이다."라는 두려움보다 더 커진 탓이 크다. 일단 다음 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되어야 박근혜 대통령의 눈 밖에 나든, 눈 안에 들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최장집 교수와 함께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쓴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20대 총선이 그 전조였다고 분석한다.

"2016년 촛불 시위에서 보수 언론과 종편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놓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20대 총선이다. 이때 야권이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2016년 촛불 시위는 그처럼 빠른 시간에 그렇게 널리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20대 총선 결과에 숨어 있는 변화의 잠재력은 촛불 시위 과정에서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하나는 정당 체계 오른쪽의 변화였는데, 그것은 기존에 집권당을 지지했던 보수적 시민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친박 내지 박근혜식의 정치관에 깊이 회의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수도권 특히 서울에서 집권당의 참패, 그 가운데 특히나 강남 지역에서 집권당으로부터의 급격한 지지 이탈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남 지역에서도 유사한 이탈이 발생해, 야당의 약진을 가져왔다."
-박상훈, <양손잡이 민주주의> 262쪽

그럼 2016년 4월 총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8개월 뒤 새누리당 의원들이 계산기를 다시 두드려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 걸까? 모두가 기억하듯 지난 총선에서 야당이 크게 승리했던 원인은 야당이 잘해서라기보다 여당의 내홍으로 인한 반사이익 때문이었다. 이른바 '새누리당 공천 파동'이다.

다시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유승민 의원은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우던 2015년 4월 국회 원내대표 연설에서 자기 입지를 다진다. 법, 정의, 공화주의 등 보수의 가치를 담은 '명품 연설'은 그동안 새누리당의 낡은 보수주의에 싫증을 느낀 젊은 보수층의 마음을 빼앗았다.

동시에 이 연설은 유승민이 청와대의 눈 밖에 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청와대가 노골적으로 유승민에게 '배신자' 낙인을 찍은 뒤로도 유승민은 청와대 눈 밖에 나는 행동을 계속했다.결국 그는 2015년 7월 원내대표직을 내려놔야 했다. 자리를 내려놓은 유승민은 마음 놓고 당내 야당 역할을 하려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배신의 정치'라는 낙인의 벽은 너무 높았다. 총선이 가까워져 오자 당 안에서 유승민을 비롯한 비박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공천에서 새누리당 지도부는 유승민 의원뿐 아니라 다른 비박 의원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노골적인 비박 찍어내기에 나섰다. 3월 14일 당시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정체성 부적격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비박을 향해 엄포를 놨다. 사실상 "배신하면 죽는다"는 룰을 다시금 다지기 위함이었다. 당 지도부가 '정체성'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공천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겠다는 건, 결국 기준 없는 공천을 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보수 유권자가 박근혜 정부 내내 마음속에 쥐고 있던 '심지'는 여기서 끊겼다. 보수 유권자는 '정체성'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공천하겠다는 새누리당 지도부를 가만히 두고 볼 만큼 인내심 있지 않았다. 기존에 '콘크리트'라고 불릴 만큼 단단했던 새누리당 지지층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당시 언론들이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에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도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후보 등록 기간이 끝나갈 때까지 비박 의원들의 공천이 이뤄질 듯 이뤄지지 않을 듯했다. 이에 비박계 중진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공천장에 찍을 도장을 들고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영도로 내려가 버리는 '옥새 파동'을 벌이기며 청와대와 당 지도부에 항의 표시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끝까지 공천을 받지 못한 유승민 의원은 후보 등록 마지막 날 탈당해 대구 동구을에 무소속 출마한다. 보수 민심은 더욱 요동쳤다. 위기를 먼저 감지한 보수 언론은 기사와 사설을 통해 새누리당에 경고 신호를 보냈다.

image 2016년 3월 24일 동아일보 사설

image 2016년 3월 24일 조선일보 사설

유권자가 보낸 경고 신호

진흙탕 같은 공천 파동의 대가로 새누리당은 국회 다수당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 내줘야 했다. 16년 만에 국회는 '여소야대'가 됐다. 그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더 큰 충격을 준 건 바로 강남 서초 송파 등 새누리당 '텃밭' 지역구에서 일어난 이변이었다.

가장 큰 충격은 강남, 송파 지역구에서 야당 후보가 여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데서 왔다. 더불어민주당이 전략공천 1호로 강남을에 공천한 전현희 후보는 당시 현역 의원이던 새누리당 김종훈 후보를 0.1%포인트 차로 누르고 24년 만에 강남에서 당선된 야당 국회의원이 됐다. 송파병 지역구에서도 새누리당에서 김을동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후보에게 5%가 넘는 표차로 밀렸다. 김 전 의원이 새누리당에서 최고위원까지 지낸 현역 중진 의원이었음을 고려하면 뼈아픈 패배였다. 또 공천을 둘러싼 갈등 끝에 새누리당 후보가 아예 출마하지 못한 송파을과 은평을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민주당 후보에게 의석을 내줘야 했다.

공천 파동의 결과로 여당이 자신의 지역구에 경쟁력 없는 후보를 공천했다고 여긴 보수 유권자들은 고의로 무효표를 만들거나 아예 투표장에 가지 않는 방법으로 '괘씸죄'를 묻기도 했다. 19대 총선에서 1,565표에 불과했던 강남 지역 무효표는 20대 총선에서 6,371표로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서초구의 경우 19대 총선에서 무효표는 1,451표였지만, 20대 총선에선 2,947표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20대 총선에서 강남구의 투표율은 56.2%로, 서울에서 강북구(55.7%) 다음으로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2016년 10월 <한겨레> 보도를 시작으로 최순실의 존재가 드러나고 JTBC·TV조선 등 종편이 가세해 본격적으로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밝혀지자 보수 유권자들은 폭발했다. 18대 대선에서 누구를 뽑았든 상관없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대 총선 결과가 보낸 경고 신호에 87년 민주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까지 더해지자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받은 압박감은 박근혜로부터의 압박감을 넘어섰다. 그 덕분에 우리는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최장집 교수는 책에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에 찬성한 의원이 200명을 가까스로 넘었다면 헌재 역시 보수적으로 판결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박-최 사태가 국회에서의 탄핵 결정으로까지 이어진 데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양손잡이 민주화'가 현실화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보수적 정당인 새누리당에서 친박 세력들을 제외한 절반 이상이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거의 80%에 달하는 압도적 찬성으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권이 대거 탄핵 소추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찬성표가 간신히 3분의 2를 넘어서는 정도였다면, 헌재의 탄핵 결정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장집, <양손잡이 민주주의> 111쪽

법리도 법리지만 중대 결정을 내릴 때마다 민심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헌재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의 압도적 표차와 그 뒤 이어진 헌재의 탄핵 인용은 결코 야당이 혼자서 얻어낸 것이라 볼 수 없다.

보수 유권자, 탄핵을 이끌어 낸 '오른손'

5년 전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도 보수 유권자이지만, 박근혜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보수 유권자다. 5년 전 나름의 선택을 내린 동료 시민을 향해 '바보 천치'라거나,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보수 유권자들에게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식의 선'이 분명히 있고. 5년 전만 해도 새누리당이 그 상식선을 채워줬던 것뿐이다. 더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해 그 역치값을 낮추는 것 역시 야당이 지난 10년간 해야 했을 역할 가운데 하나다.

최장집 교수와 박상훈 학교장은 책에서 제대로 된 보수 세력의 부재는 한국 민주주의에 큰 결함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콘크리트 지지 기반'이라는 말만큼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 기반을 잘 말해 주는 것은 없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보수적 가치·이념·정체성의 강고함을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1970년대 박정희 개발독재와 그것이 만들어 낸 업적, 리더십을 신비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델이 권위주의 시기에 완성되었지만, 민주화 이후로 이어져 하나의 헤게모니가 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그 힘을 대표해 왔다. 이번 박-최 사태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이런 콘크리트 지지 기반이 해체됐다는 것이다. 이는 곧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지 기반을 붕괴시킨 힘이 보수 세력 내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새누리당 비박계 분파의 탄핵 지지 결정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최장집, <양손잡이 민주주의> 108쪽

이번 탄핵 정국과 대선에서 그 결함이 메꿔진다면 87년 체제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을까? 대선이 그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구 새누리당 지지층이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에게 마음을 줄지, 어제 바른정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유승민 의원에게 마음을 줄지, 그도 아니면 한 번 더 자유한국당을 선택할지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게 되는 이유다.


참고문헌 image <양손잡이 민주주의>, 최장집, 박상훈, 서복경, 박찬표 (후마니타스, 2017) 사진=정치발전소

커버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