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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나와서 개발자가 됐다고?

대한민국에서 여성 개발자로 살아남기 (1)

조경숙 2017년 07월 18일

나는 여성이고 한 아이의 엄마이며 간신히 경력을 붙들고 있는 개발자다. 지난 6년간 쌓아 온 개발 경력이 뒤죽박죽 섞인 데다가 업무 외 시간에 개발 공부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어 늘 '경력 단절'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뭐라도 해야된다는 의무감으로 아이가 요리해주는 장난감 음식들을 먹는 시늉을 하면서 한쪽엔 개발 서적을 펼쳐놓고 곁눈질로 책을 읽는다.

대학 시절 나의 전공은 국문학이었고, 졸업 후엔 IT 기업에 입사했다. 이 한 문장만 봐서는 전공과 척을 진 것 같지만, 내겐 나름의 맥락이 있었다.

소설가 꿈꾸던 소녀, 개발자 되다

인터넷 회사에서 일했던 아버지 덕택에 우리 집엔 컴퓨터가 일찍 들어왔다. 90년대 후반부터 나와 오빠는 부모님 몰래 ‘넷츠고’에 접속해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를 하고, 그 이후에는 게임 팬픽을 쓰고 싶어서 ‘네띠앙1’으로 개인 홈페이지를 시작했다. (전화비만 20만 원이 넘게 나와 엄청 맞았다.)

image 게임 팬픽을 쓰고 싶어서 '네띠앙'으로 개인 홈페이지를 시작했다. 전화비만 20만 원이 넘게 나왔다. 사진=소금이의 행복한 하루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나모 웹에디터로 열심히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소설을 연재했다. 이후에는 제로보드로 넘어갔고, 이후에도 약 십여 년 가까이 개인 홈페이지를 제작해오면서 PHP, Javascript, CSS 에 입문했다.

홈페이지 제작 기술은 가난했던 대학생 시절에 유용하게 쓰였다. 학생회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거나 이런저런 행사의 웹 포스터를 만들어주면서 약간의 용돈 벌이를 했다. 여전히 글을 쓰는 건 좋았지만 대학에는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글공부를 그만두면 뭘로 돈을 벌어야 하지?’ 답 없는 고민만 이어가던 때 ‘전공 무관'으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채용한다는 IT기업의 채용 공고를 발견해 곧바로 지원했다. 그 당시 <사이보그 선언>,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성> 을 썼던 ‘이과 페미니스트' 다나 해러웨이에게 푹 빠져 있었던 것도 큰 작용을 했다.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기술과 페미니즘의 접합은 그냥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image '글공부를 그만두면 뭘로 돈을 벌어야 하지?' 고민하던 때 푹 빠져 있던 '이과 페미니스트' 다나 해러웨이. 사진=wikipedia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기술과 페미니즘의 접합은 그냥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비전공인데 잘하시네요”

입사한 이후 학사 졸업증을 손에 쥐고도 나는 ‘비전공'이었다. 컴퓨터공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등 공대를 졸업했거나 수학교육과, 통계학과, 컴퓨터교육과 등 최소 이과인 사람들만 ‘전공'으로 대우받았다. ‘전공이세요?’ ‘아뇨 저 비전공이요.’ 비전공이라고 하면 보통 전공을 다시 묻지 않았다. 신입사원 딱지를 떼고나면 ‘비전공'이라는 말도 그만하게 될 줄 알았는데 7년 차가 되어가는 지금에도 여전히 ‘비전공'은 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경력직으로 이직하더라도, ‘비전공인데 잘하시네요' 정도가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비전공' 신입사원이 개발자가 되는 과정은 험난했다. ‘전공무관' 신입사원을 채용했던 첫 회사에서 약 3개월 정도 집중 합숙 훈련을 받았다. 매일 아침 8시 30분마다 필기시험을 봤고, 곧이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코딩 강의를 들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오후 7시부터는 개발 실기 과제를 풀었다. 자정을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밤 11시가 되기 전까지는 서로 모르는 걸 알려주는 것도 금지되었다. 가능한 한 혼자 공부해서 풀어야 했고, 외부 인터넷도 차단되어 있어서 구글 검색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과 시간 중에는 반드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정한 오피스 룩을 유지해야 했다. 전날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아침엔 스타킹과 구두를 신었다. (밤 10시가 넘어가면 자유 복장이 허용됐다.)

이 연수의 목적 중 하나는 ‘올바른 스트레스 관리'였다. 강의 매니저들은 군대 같은 스케줄이어도 스트레스를 본인이 스스로 잘 관리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현업으로 들어가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야근이 잦고 밤샘이 이어지는 때도 있기 때문에 연수 기간 중에 스트레스 관리법을 미리 학습한다는 취지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스트레스 관리'에 성공한 케이스로 분류되어 있었다. 연수가 끝나고 현업에 투입된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교육팀에서 찾아와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개발 성적이 우수해서 인터뷰 대상이 됐나보다, 혼자 자만에 취해있었는데 그들이 불쑥 꺼낸 질문은 스트레스 관리법에 대한 것이었다. 질문을 받은 순간 나는 완전히 얼음이 되어 버렸다.

“코딩 가르친다고 300만원 대 줬더니”

합숙 훈련 첫날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한창 긴장하며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부재 중 전화가 한 통 찍혀 있었다. 쉬는 시간에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너무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왔다. 절친한 친구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강의 시간이 되어 자리에 앉았지만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뒷자리에서 계속 울다가 다음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강의 매니저 사무실에 찾아갔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일과 시간이 끝난 뒤인 오후 여섯시 이후 장례식장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으나 거절 당했다.

오늘이 첫날이어서 그런가, 하고 다음 날엔 내보내주겠거니 했는데 그 다음 날도 외출을 허락받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앉혀 놓고 수석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연수원에서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어요. 이 연수 과정이 공짜인지 알아요? 팀에서 삼백만 원이나 돈을 내서 교육받는 거예요. 나가려면 지금 팀장에게 전화해서 삼백만 원짜리 훈련 과정을 포기하겠다고, 죄송하다고 하세요."

사회생활이 처음이었던데다가 이미 이성이 마비되어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던 나는 매니저의 협박에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회사의 생리를 전혀 몰랐던 터라, 회사가 내게 지출하는 삼백만 원의 교육비는 너무 비싼 비용처럼 여겨졌다. 내가 ‘비전공'이기 때문에 회사가 손해보는 것이라고 느껴져 매니저의 말에 항변할 수 없었다. 단지 한두 시간이면 되는 외출이었는데도 말이다.

핸드폰은 수시로 반납해야 했고 쉬는 시간은 짧아서 바깥에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장례식에는 가지 못했고, 친구에 대한 죄책감과 억울함, 분노 등 풀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속에 쌓여 나는 연수 기간 내내 깊은 우울에 시달렸다. 그나마 연수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건 내가 대단한 ‘스트레스 관리법'을 터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연수를 받던 동기들의 지극한 위로와 배려 덕택이었다.

image illustration=Grace Heejung Kim

수석 매니저가 나를 굳이 인터뷰 대상으로 꼽았던 건 이 때문이었다. 인터뷰에서 매니저는 그 사건을 들추면서 연수 기간 동안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물었다. 그뿐 아니라 그때 꼭 외출하지 않았어도 잘 끝나지 않았냐면서,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기더라도 외출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고 직접 말해달라고 했다. 악의적인 질문에도 나는 또다시 머리가 새하얘지기만 하고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나도 매니저도 둘 다 똥 씹은 얼굴로 인터뷰를 마쳤고, 다행히 내 인터뷰는 어디에 쓰이지 않고 폐기되었다.

최근 수소문해보니 그 연수 과정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합숙에서 출퇴근으로, 개별 과제에서 팀 과제로 변경됐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신입사원 채용 인원을 절반 이하로 줄이거나 나와 같은 ‘비전공’ 입사자의 비율을 대폭 낮춰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IT 기업조차 하대하는 개발자

그 당시 회사는 1인당 삼백만 원의 비싼 교육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왜 굳이 '비전공'을 뽑아 개발을 가르쳤을까? 교육을 담당하던 임원이 교육장에 왔을 때 이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는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개발 자체보다 시스템이 구현하려고 하는 업무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개발은 '조금만 가르쳐도 누구나 다 하는 것'이지만 프로세스 이해도와 커뮤니케이션 스킬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였다. 경영진들이 어떤 데이터를 근거 삼아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몰라도, IT 기업에서조차 개발자를 하대하고 개발을 천시하는 문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현업에 들어와서 보니,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는 건 개발자 개개인의 이해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사소통 체계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경우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동기 중에 아직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비전공'이었던 이들은 특히 더 빨리 퇴사했고 아예 커리어를 바꾸는 일도 많았다. 그들 가운데 아직까지 개발 전선에 있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3개월 간 강도 높은 합숙 훈련에도 현업의 턱은 높았고 '전공'과의 갭은 깊었다. '비전공'이 개발을 하는 건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회사에게도 사원에게도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여성 개발자로 살아남기 (2) 여자들은 멀티가 되잖아, 남자는 개발밖에 못 해가 이어집니다.

Cover=Grace Heej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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